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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빈 Nov 04. 2019

주워도 될까?

한 번쯤 자문해본다면

주워도 될까?


나는 어릴 적부터 스스로 운이 없다고 여기며 성장해왔다. 그런 믿음이 처음 생겨났던 건 약 25년 전, 어린이집에서 어디 야트막한 동산으로 소풍을 갔을 때다. 간식도 먹고 이런저런 활동들을 했겠지만 기억에 남는 거라곤 보물 찾기뿐이다. 


크지 않은 바위틈이나 커다란 나뭇잎 아래, 또는 나무 둥치 뒤에 숨겨 놓은 쪽지를 찾아내는 게 다였다. 친구들은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가고 나도 일단은 신이 나서 여기저기 둘러보긴 했는데 거짓말처럼 단 하나도 찾지 못했다. 겨우 5살, 6살 원생들을 위한 보물 찾기였으니 난이도는 분명 최하였을 것이고 ‘찾는다’는 표현보단 차라리 ‘줍는다’는 표현이 더 적합했을 텐데도 그랬다. 울먹이는 나를 위해 가장 보물을 많이 찾은 친구의 쪽지를 1, 2장쯤 얻었다. 그럼에도 나는 기쁘지 않았고, 정당하게 챙긴 제 몫을 ‘양보’라는 명분으로 빼앗긴 그 친구의 표정도 그리 밝진 않았다. 


어렴풋이 그때부터 ‘나는 왜 운이 없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따지고 보면 내게 부족했던 건 운이라기보다는 노력이나 눈치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지만, 우울했던 유년기의 나는 스스로를 규정해버렸다. 난 운이 없어, 운이. 


지난 30여 년을 통틀어 그나마 운이 좋았다고 생각되는 일들은 모두 우연찮게 돈을 주웠던 기억들이다. 초등학생 때는 오락실에서 누가 흘려놓고 간 100원, 200원을 줍고서 기뻐했다. 웬만한 게임들은 100원이면 1판을 할 수 있었고 마리오 카트는 100원에 2판도 할 수 있었으니까. 고등학생 땐 경운산 등산을 갔다 내려오는 길에 5천 원을 주운 적도 있다. 빠른 속도로 뛰어내려오는 중에도 흙색으로 너저분하게 깔린 나뭇잎과 반으로 접힌 5천 원을 구분해냈다. 그 돈으로는 무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뻔하고 하찮은 일에 썼을 것이다. 


서른한 살 추석 땐 꽤 큰돈을 주웠다. 아파트 놀이터에서 2 살배기 조카와 놀아주다가 무려 1만 5천 원을 주운 것이다. 만원 지폐와 5천 원 지폐가 멀지 않은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구깃구깃한 걸로 봐선 친척 네 놀러 온 초등학생들이 흘리고 간 것 같았다. 혹시라도 조카와 놀이터를 뜨기 전에 다급한 표정의 아이가 돈을 찾으러 온다면 돌려줄 생각도 있었지만 20분 넘게 아무도 오지 않았다. 결국 그 돈으로 조카의 간식과 자질구레한 장난감을 샀다. 돈을 잃었을 아이에겐 미안하지만 한입 가득 과자를 먹는 조카를 보며 꽤 뿌듯하고 기뻤다. 적고 보니 그런대로 운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30년을 탈탈 털어 2만 원 하고 몇 백 원 주웠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소박하다. 여담이지만 당연히 복권 당첨운도 없었다. (그래도 매주 로또를 한다. 미련하게도.)


며칠 전엔 아름이와 길을 걷다가 바닥에 못 보던 a4 용지가 붙어있는 걸 봤다. 흰 용지에 검은 글씨. 반려동물이라도 찾는 건가 싶어 봤더니 ‘동양 팰리스 근처에서 현금 60만 원을 습득하신 분은 연락 부탁드립니다.’라는 문장과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어허, 60만 원이라. 꽤 큰 금액이지만 퍼뜩 든 생각은 ‘아마 이 돈은 못 찾을 것 같은데?’였다. 그랬다가 금방 스스로를 질책했다. 그런 생각의 기저에는 ‘만약 내가 60만 원을 주웠더라도 안 돌려줬을 것 같은데?’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누가 흘리고 간 60만 원 정도는 양심의 가책 없이 꿀꺽할 수 있는 인간인 걸까. 아니다. 나는 착해서가 아니라 간이 작아서 그건 어려울 것 같다. 60만 원이면 뻔뻔함만으로 퉁 치기엔 너무 크다. 나는 아마 당장 가까운 파출소에 가서, 아무 죄도 짓지 않았지만 정말 결백하다는 표정으로, 이 돈을 주웠으니 주인을 찾아달라고 말하고, 다시 한번 처음 주웠을 때 그대로 들고 왔음을 강조했을 것이다. 


몇 백 원과 몇 천 원과 몇만 원, 그리고 60만 원. 얼마까지는 그저 운이라 생각하고 기분 좋게 주워다 쓰고, 얼마부터는 겁이 나거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걸까. 아마 사람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맞춰 경중을 따지게 될 것이다. 나처럼 소박한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5만 원부터는 기분 좋게 주워다 쓰기에 약간 어려울 것 같다. 나에게 5만 원이 꽤 큰돈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돈을 잃은 누군가에게도 큰돈일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하루에도 몇 백 만원쯤 쓸 수 있는 부유한 사람에게 5만 원은 그냥 주워다 써도 아무렇지 않은 돈일 수도 있다. 아니다, 그 정도 부자라면 귀찮아서 안 주우려나. 아니지, 5만 원은 허리 한 번 굽히는 것에 비하면 충분히 큰돈이니까 아마 주울 것도 같고. 모르겠다. 그만큼 부자였던 적이 없어서. 아, 결국은 사람마다의 차이일 텐데. 이렇게 돈이 많고 적음으로 손쉽게 사람을 재단하려는 유치하고 속물적인 나의 태도에, 글을 쓰며 다시 한번 반성하게 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지지리 운이 없다고 믿는 내게 몇 없는 운 좋았던 순간들은 모두 돈을 주웠던 경험이고, 결국 그건 누군가 흘리고 간 아쉬움을 주워 얌체같이 행복해했던 경험이었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그 경험들을 두고 ‘운이 좋았다’고 말하는 것도 그만둬야겠다. 내 앞에 찾아온 운이 누군가의 아쉬움이나 상처를 담보로 하는 것이라면, 돈이 아니더라도 다 마찬가지다. 그건 운이 좋았던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좀 뻔뻔했던 일들이었다. 


그 정도 뻔뻔해도 어디 가선 착하다거나 예의바르단 소릴 들을 수 있는 세상이지만, 이런 글을 썼다고 내가 주웠던 돈을 지금이라도 돌려줄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만약 또 몇 천 원이나 몇 만 원쯤 주울 기회가 온다면 아마 나는 또 주워다 쓰긴 하겠지만, 그래도 이제 한 번쯤 자문해볼 수는 있어야겠다. 


이거, 주워도 될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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