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다치지 않을 만큼만
2020年 7月 27日의 기록
2020년 8월부터 2021년 1월까지,
6개월 동안 구독자 분들께 이메일로 연재했던
일간에세이를 브런치에 공개 연재합니다.
1년 전 이맘때의 제 기록들을 통해
1년 전 독자분들의 나날을
되짚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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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서른두 해 동안 올해만큼 많은 안전 안내 문자와 긴급 재난문자를 받아본 적이 없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창궐한 탓이 가장 크고 요즘은 장마철이라 호우 관련 문자가 잦다. 이 글을 쓰기 5분 전에도 구청에서 침수와 안전사고 예방에 만전을 기해 달라는 문자가 들어왔다. 오늘 부산에는 최고 200mm 이상의 집중호우가 예상된단다.
2주 전에도 폭우가 내려 부산의 동천이 범람했다. 친구 J가 사는 아파트가 하필 동천 바로 앞이라 그날 수도와 전기가 모두 끊겼다. 강물이 건물 지하실까지 흘러 들어간 탓이었다. 정비 업체 말로는 반나절 만에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계단을 타고 고층까지 오르는 수고야 그렇다 치더라도 집집마다 냉장고에 쟁여둔 식재료들이 문제였다. 그나마 J는 그리 멀지 않은 거제에 회사 펜션이 있어 급한 대로 식재료들을 옮겼지만, 달리 갈 곳 없는 주민들은 어떡하나.
J와 함께 땀을 흘리며 12층을 오르내리는 동안 층계에서 꽃무늬 일바지를 입은 할머니 한 분을 봤다. 지친 표정의 노인은 복도에 널브러진 여행용 캐리어 가방과 짐들을 눈으로 훑고 있었다. 할 수 있는 일은 우선 그것뿐이라는 것처럼.
어릴 땐 장마철마다 TV 화면 귀퉁이에 ‘수재민 돕기 ARS’ 전화번호가 있었다. 전화 한 통에 1,000원이나 2,000원씩 돈을 기부하는 방식이었다. 학창 시절 주택과 아파트 등 전셋집을 몇 차례 옮겨 다니는 동안 우리 집은 늘 수재 안전지대였다. 그 덕에 차로 겨우 30분 거리의 집들이 흙탕물에 잠겨도 남 일인 줄로만 알고 살았다.
J를 돕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문득, 요즘은 수재민 돕기 ARS를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우리가 TV를 자주 보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말했지만 포털에 검색해봐도 2010년 이후로는 관련 뉴스가 없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군가를 돕고 있겠지만, 수재민 돕기 ARS가 사라진다고 수재민이 사라지는 건 아닐 테다. 아직 젖은 몸을 채 추스르지 못한 이들은 분명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빗줄기가 굵은 날이면 죄책감처럼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중2병’이라는 말이 생기기도 전인 2003년, 하필이면 나도 중학교 2학년이었다.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가수가 되겠다며 부모님께 공언했다. 후에 그 공언(公言)이 결국 치기 어린 공언(空言)이라는 게 밝혀졌지만, 당시에 나는 매우 진지했다. 노래를 곧잘 하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끼가 있는 것도 아닌 서민층의 아들이, 다룰 줄 아는 악기 하나 없고 그저 얌전히 공부나 하던 아들이 갑자기 가수라니. 아버지는 늘 그랬듯 ‘하고 싶으면 해야지, 우짜겠노.’ 하는 식이었고, 엄마는 걱정과 원망이 섞여 나를 회유했다 타박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그날이 주말이었던가.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의 과정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원래 상처 준 사람은 기억에 성의가 없다. 어쩌면 엄마는 모두 기억하고 상처를 품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내가 장롱문을 부술 듯이 닫으면서 엄마에게 쌍욕을 하고 집을 뛰쳐나왔다. 태어나서 부모에게 그런 욕을 한 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고 하지만 내 기억을 믿을 수가 없다. 상처 준 사람은 기억에 성의가 없을 뿐 아니라 뻔뻔한 경우가 많다.)
하필 장마철인 듯 빗줄기가 거센 날이었다. 지갑도, 돈도, 우산도 없이 냅다 뛰쳐나온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비를 맞으며 하릴없이 걷는 것뿐. 내동중학교 뒷길로 올라 골목골목을 헤매다가 해반천을 따라 걸었다. 시외버스 터미널을 지나 논밭이 펼쳐진 전하동까지 걷는 동안 날이 어둑어둑해지며 한기와 허기가 동시에 밀려들었다. 결국 부모의 울타리 밖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엄마에게 한 짓에 대한 죄책감을 두 다리에 하나씩 짊어진 기분이었다.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이 없었다. 엄마의 얼굴을 볼 자신도,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할 자신도. 집으로 가는 길, 내 걸음은 뛰쳐나올 때보다 훨씬 느리고 무거웠다.
점심쯤 집을 나온 나는 자정이 다 되어서야 집 앞 골목에 다다랐고, 가로등 불빛 아래 빗금처럼 그어진 빗줄기 속에서 우산을 쓰고 날 기다리는 엄마를 봤다. 뻔뻔하게도 안도감이 먼저 느껴졌다. 그날 나는 하루 종일 걷느라 뭉친 다리를 굽히지도 못한 채 좁은 부엌에 앉아 엄마가 끓여준 라면을 먹었다. 죄송하다는 말을 했던가. 나는 했던 것 같은데, 엄마의 기억은 어떤지 모르겠다. 상처 준 사람은 늘 이런 식이다.
화창한 햇볕도 너무 강하면 피부를 상하게 하고 시원한 바람도 태풍이 되면 소중한 것들을 이리저리 날려 보낸다. 살림살이를 덮치고 생활을 멈추게 하는 장마철의 폭우에 ‘비의 낭만’이라는 수식은 어울리지 않는다. 가랑비에도 가슴을 콕콕 찔린 듯 아파할 수 있는 게 사람이라지만, 17년 전 철없던 나처럼 일부러 사람 가슴에 대못을 박을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것도 하필 엄마가 좋아하는 비 오는 날에.
비가 오면 그렇게 잘못했던 일들이 종종 생각난다. 누군가에게 상처 줬던 일들이 비처럼 후드득 떨어진다. 아무에게도 상처 주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은,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을 때 그 자체로 상처가 되고 만다.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새긴 상처가 빗줄기보다 적다고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폭우에 침수되고 상처 받고야 마는 사람들이 다시 빗물을 걷어내고 젖은 몸을 닦아내듯이, 상처를 주고받는 와중에도 우리는 서로를 위하며 고민하고 살아낸다.
거리에선 넘쳐흐르는 빗물에 차가 침수되고 집의 전기와 수도가 끊긴다. 며칠 전 부산에선 지하차도 침수로 사람이 죽었다. 오늘 같은 날에는 아무도 다치지 않을 만큼의 비만 내렸으면 좋겠다. 그게 너무 큰 욕심이라면 다시 털고 일어설 수 있는 만큼의 비만 내렸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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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年 7月 27日, 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