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티지와 미니멀리즘
2020年 7月 30日의 기록
2020년 8월부터 2021년 1월까지,
6개월 동안 구독자 분들께 이메일로 연재했던
일간에세이를 브런치에 공개 연재합니다.
1년 전 이맘때의 제 기록들을 통해
1년 전 독자분들의 나날을
되짚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시대에 노력과 성공이 서로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아니듯, 어떤 일에 관심을 갖는 것과 그 일을 잘 해내는 것 또한 인과관계는 아니다. 물론 노력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노력하는 사람의 성공 가능성이 더 높을 수 있다. 관심이 없는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 그 일을 잘 해내기 쉬울 수도 있다. 이렇듯 원인과 결과로 확정할 수는 없지만 서로 분명한 관련이 있는 관계를 상관관계라고 부른다.
나의 독서와 글쓰기는 서로 인과관계에 가깝고, 옷에 대한 관심과 패션 감각은 상관관계에 가깝다. 나는 옷도 신발도 좋아하지만 패션 피플은 아니다. 티셔츠는 검정, 회색, 푸른색이 대부분이다. 칠칠맞지 못하게 음식을 잘 흘려서 희거나 밝은 옷이 몇 없다. 바지도 무난한 청바지와 검은색 조거가 대부분이고 여름엔 주로 반바지를 입는다. 신발을 좋아해 운동화니 구두니 10켤레 넘게 사두기도 했는데 그마저도 결혼 후엔 같은 운동화만 신게 된다.
그렇다고 옷이 몇 없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서두에 밝혔듯 나는 패션 피플은 아니지만 옷에 관심은 많아서 수시로 각종 세일에 홀려 옷을 사곤 했다. 그건 정말이지 최악의 쇼핑 습관이다. 매번 거기서 거기인 옷을 사서, 내 옷장의 옷은 왜 죄다 거기서 거기인가 하며 탄식을 한다. 굳이 내 쇼핑 형태를 정의하자면 ‘스투피드 맥시멀리스트’ 정도 되겠다.
그 와중에 다행스럽게도 마음에 드는 옷은 질려하지 않고 잘 입는다. 옷뿐만 아니라 음식이나 노래, 운동 등 거의 모든 방면에서 내 취향은 편협하고 꾸준하다. 올해 여름엔 작년에 산 스파오의 오트밀 색상 티셔츠와 프라이의 검정 티셔츠, h&m 회색 티셔츠와 나이키의 기능성 티셔츠를 돌려가며 잘도 입고 있다. 그리고 네이비색 빈티지 티셔츠도 자주 입는다.
그 빈티지 티셔츠는 현재 내 옷 중 유일한 빈티지 의류다. 2년 전 남포동의 빈티지뮤지엄이라는 샵에서 1만 8천 원인가를 주고 샀다. 왼쪽 가슴에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딱따구리 캐릭터인 우디 우드페커와 ‘UNIVERSAL STUDIO JAPAN GRAND OPENING 2001’이라는 글자가 프린팅되어 있다. 설명이 필요 없는, 참으로 직설적인 빈티지 딱따구리 티셔츠인 것이다. 이 티셔츠는 2001년 일본 오사카의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오픈할 때 기념품쯤으로 판매했을 것이다. 내가 구입할 당시 이미 17년이라는 시간의 세례를 받은, 확실한 빈티지 티셔츠였다.
그 티셔츠는 몸통 옆 봉제가 없는 튜블라 방식이라 착용감이 좋다. 꾸준히 커지는 내 덩치를 무리 없이 감싸는 사이즈도 마음에 든다. 이미 부드러워질 만큼 부드러워진 촉감은 마치 잠옷 같다. 무엇보다 17년, 아니 이제는 19년이나 된 티셔츠인데 어디 하나 찢어지거나 구멍 난 곳이 없다. 나는 그 빈티지 딱따구리 티셔츠를 입고 운동을 하거나 집 가까운 마트에 장을 보러 다녔다. 조카들과 놀이터에서 놀 때, 헬스장 갈 때, 가끔은 동네 카페에 갈 때도 입었다. 아무래도 차려입은 느낌은 아닌데, 이상하게 보통의 어수룩한 티셔츠를 입을 때와는 달리 부끄럽지 않았다. 이건 빈티 나는 게 아니라 빈티지니까.
처제는 유독 빈티지 딱따구리 티셔츠를 싫어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는 구제(라고 부른다. 빈티지보다 구제라는 단어가 처제의 심정을 더 적확히 드러내는 것 같다.) 옷을 꺼림칙하게 여긴다. “죽은 사람이 입은 옷이면 어떡해? 더러운 게 묻거나 피가 묻었을 수도 있잖아.”라는 식으로 극단적인 가정을 한다. 정말 그런 거라면 나도 꽤 찝찝할 테지만, 확인할 길도 없고 딱히 확인하고 싶지도 않다. 오랜 세월을 멀쩡히 버텨낸 사실만으로도 대견하고 무엇보다 착용감이 좋으니까.
처음엔 처제의 반응이 좀 유별나게 느껴졌는데 달리 생각하면 사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더 깊어 그런가도 싶다. 아는 만큼 보이고 사랑하는 만큼 아픈 법이다. 신발을 좋아하는 내가 이 신발은 이렇고 저 신발은 어떻고 얘기해봐야 아내와 처제의 눈엔 그저 똑같은 나이키 운동화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내게는 그저 편한 티셔츠일 뿐이지만 옷에 대한 나름의 관심과 의미를 찾는 처제는 나의 19년 된 빈티지 딱따구리 티셔츠를 싫어할 수 있는 것이다.
빈티지 의류에 대한 처제의 관심은 부정적이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빈티지 의류에 관심과 애정을 갖고, 심지어 업으로 삼기도 한다. 인스타그램에서 내가 팔로우하는 계정 중 kicks_montana_와 soobaak_vintage가 있다. 킥스 몬타나는 70~90년대 사이의 빈티지 스니커즈를 다루고 수박 빈티지는 의류와 신발, 소품, 잡화를 모두 다룬다. 인스타그램 피드만 살펴봐도 빈티지에 대한 애정과 철학, 역사적인 배경지식까지 탄탄한 분들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어쩌면 그저 남들이 쓰다 내버린 물건들이 그들에겐 역사를 품고 있는 작품처럼 귀하다. 실제로 70년대 나이키 스니커즈는 몇백만 원을 호가한다. 나는 그 돈을 주고 빈티지 스니커즈를 살 마음은 없지만 그들이 빈티지 물건에 부여하는 의미와 애정에 대해선 존중하는 편이다. 나는 그보다 훨씬 사소한 것조차 내게 의미가 있다면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빈티지 의류를 싫어하는 처제는 얼마 전 돌연 미니멀리즘을 선언했다. 두 조카가 커가면서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살림살이가 자꾸 늘어 내린 결정이었다. 아이들의 장난감과 오랫동안 쓰지 않은 갖가지 물건들, 입지 않는 부부의 옷까지 한바탕 정리를 끝내자 집은 마치 시야가 트인 듯 말끔해졌다.
그런 처제라도 내다 버리기 힘든 물건이 있지 않았을까, 하고 나는 생각해본다. 너무 허름해서 입기는커녕 바닥에 튄 물기 닦을 때나 쓸 법한 티셔츠라도 남편과 연애 시절 애틋한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면. 부서지고 고장 나 다른 집 아기들에게 물려줄 수도 없지만 아이가 처음 말을 떼고 이름을 붙여준 장난감이라면. 앞코 가죽이 벗겨져 볼품없지만 입사 면접을 위해 수십 번 신었던 구두라면 말이다.
내게도 그런 물건과 순간들이 있다. 쓰리잡, 포잡을 뛰며 나름 수입이 괜찮았던 때 산 나이키의 베이퍼 맥스 운동화. 뒤축이 닳을 대로 닳아 에어 중창이 언제 터질지 모르지만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잘만 신고 다닌다. 5년 전, 아름이가 생일 선물로 사준 아디다스의 국방색 오리털 파카. 그새 덩치가 많이 커진 탓에 지난겨울부터 사이즈가 작아 거의 입지 못했지만 어쩐지 버리기엔 아쉽다. 돈도 별로 없었고, 한파에 입을 두터운 파카도 없었던 시절에 받은 이십만 원이 넘는 선물이어서만은 아니다. 새벽에 신문을 돌리고 낮에는 강의를 듣고, 저녁에는 재수 학원에 출근하는 내내 그 파카를 입고 지냈던 시절의 온기가 여전히 소중해서다. 조카들이 집에 놀러 와 TV 화면이나 거실 창에 찍어두고 간 손자국들도 며칠을 지우지 않고 둔다. 예쁘고 애틋하다.
따지고 보면 그런 것들이 모두 다 빈티지다. 빈티지란 그저 오랜 세월을 묵혀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똑같은 음식이라도 부패와 발효가 다르듯, 그저 썩어 분리수거되는 물건과 역사와 의미를 담고 있는 물건은 다른 것이다. 그러니 내가 가진 의류 중 빈티지가 하나뿐이라는 앞의 문장을 수정할 필요가 있겠다. 19년 된 빈티지 딱따구리 티셔츠 말고도 내게는 나름의 사연을 지닌 빈티지가 가득하다.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 없다는 말은, 누구나 빈티지한 순간들을 품고 산다는 말과 같다. 이런 글을 다 적고 보니 ‘스투피드 맥시멀리스트’였던 나도 꽤 괜찮은 빈티지 수집가가 아닌가 하는 위안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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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다 쓰고서 처제에게 전화해 “그때 정말로 모든 불필요한 물건을 정리했느냐. 혹시 쓸모는 없지만 뭔가 애틋하고 아쉬워서 버리지 못한 물건이 있느냐.”라고 물었다. 그녀는 그런 건 하나도 없었고 정말 말끔하게 다 버리는 것으로 미니멀리즘을 실천했다며, 뿌듯한 말투로 자신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처제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다. 빈티지와 미니멀리즘은 공존할 수 없는 걸까. 글을 완성하고서 고민이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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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年 7月 30日, 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