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엔 보고 싶은 사람을 봐요

2020년 7月 31日의 기록

by 김경빈
2020년 8월부터 2021년 1월까지,
6개월 동안 구독자 분들께 이메일로 연재했던
일간에세이를 브런치에 공개 연재합니다.
1년 전 이맘때의 제 기록들을 통해
1년 전 독자분들의 나날을
되짚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월요병이 없다. 프리랜서로 지내는 동안은 출퇴근을 하지 않으니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다. 쓰리잡, 포잡으로 요일 구분 없이 일을 쳐내던 시절엔 월요병을 따로 앓을 정신이 없었다. 확률적으로 주말에 과음을 한 탓에 월요일에 끙끙 앓았던 적은 많았겠지만, 고질적인 월요병을 겪은 적은 드물다. 해서, 지금의 나는 월요일에 별 감흥이 없다.


일주일 중 내게 의미 있는 건 수요일과 금요일 정도다. 4년 전에 나는 초보 라디오 작가, 그것도 영어 방송국의 라디오 작가로 일일 프로그램을 맡았다. 천만다행으로 영어 방송국의 유일한 한국어 프로그램이었지만 그럼에도 코너를 짜고 대본을 작성하려면 웬만큼의 영작문 실력은 필요했다. 수능 영어나 토익 문제는 그런대로 풀겠는데 정작 나의 실전 영어 실력은 젬병이었다. 게다가 DJ 2명 중 1명은 방송국의 제작국장님. 잘해야 한다는 강박이 라디오 작가가 되었다는 기쁨을 짓눌렀다.


작가 생활 초기엔 매일이 실수와 고난과 퇴고의 연속이었다. 콩트나 드라마 대본은 고사하고 몇 줄 되지 않는 오프닝도 제대로 적어내기가 어려웠다. 짧은 에세이 코너의 대본이 생방송 10분 전까지 완성되지 않아 식은땀을 흘린 적도 있었다. 결국 그날은 DJ이자 제작국장인 유정임 국장님이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대본으로 방송되었다. 라디오 부스 밖에서 국장님에 대한 존경심과 내 실력에 대한 자괴감으로 한숨만 푹푹 쉬어댔던 게 아직도 생생하다.


국장님 옆 다른 DJ의 이름은 에릭. 나보다 두 살 많은 형이었는데 생물학적으로는 한국인이지만 법적으로나 문화적으로는 미국인인 재미교포였다. 만인에게 친절하고 장난기가 많고 일을 대충 처리하는 면이 있었다. 한국말이 약간 어눌하고 목소리가 정말 멋있었다. 내가 영어 대본으로 골머리를 앓거나 편집실에서 음성 파일 찾는 걸 헤매고 있으면 늘 먼저 다가와 도와줄 것이 없는지 묻는 사람이었다.


매일 생방송 대본을 적느라 낯짝이 노랗게 뜬 어느 수요일, 에릭은 “경빈씨, 힘내요. 오늘은 hump day잖아요!” 라며 대뜸 커피를 건넸다. hump는 낙타의 혹 가장 높은 부분을 뜻한다. hump day(험프 데이)는 일주일 중 가운데쯤인 수요일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수요일만 지나면, 이 hump만 넘으면 고된 일주일도 수월하게 끝날 것이다. 목, 금 이틀만 일하면 주말이다. 그런 의미로 수요일을 hump day라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순간에는 아무 위안이 되지 않았는데 그 이후로 뭔가 힘든 일을 해내고 있을 때, 그런데 정신 차려 보니 마침 그날이 수요일일 때, 나도 모르게 hump day를 속으로 외고 있었다. 라디오 작가 일을 할 때도, 택배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판교에서 근무하며 주말 부부로 지내던 몇 개월 동안에도 수요일마다 떠올렸다. 오늘은 hump day다. 이번 주도 이제 다 갔다. 며칠만 지나면 쉴 수 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수요일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의 연료통을 새로 갈아 끼웠다.


내가 사랑하는 또 하나의 요일, 금요일. 12년 전 대학 신입생이었던 아내와 나는 같은 학과였다. 고등학교 동창이라 원래도 일면식이 있던 우리는 대학에서 더 가까워졌다. (가까워지다가 기어코 결혼까지 했다.) 당시 나는 학교 앞 고시텔에서 지내며 일주일에 한 번 본가에 다녀왔고, 아내는 본가인 김해에서 매일 통학을 했다. 1학년 때라 듣는 강의가 비슷했고 가끔 분반만 서로 다른 정도였다.


매주 금요일마다 ‘문장의 이해와 표현’이라는 필수교양 강의를 듣고 나면 나는 아내와 함께 지하철을 타러 갔다. 부산-김해 경전철이 개통하기 전이라 2호선 구명역에 내려 다시 127번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지하철과 버스는 늘 만원이었고, 1시간 30분 동안 고단한 일주일을 살아낸 사람들의 갖가지 냄새 속에 갇혀 있는 건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아니어야 정상인데, 이상하게 아내와 함께 본가로 향하는 금요일만큼은 유쾌했다. 즐거웠고, 설렜고, 1시간 30분이라는 시간이 아쉬웠다. 학과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2학기에도 아내와 김해로 돌아가는 금요일 저녁 시간만은 마음이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올해 1월부터 3개월 동안 경기도 판교에서 카피라이터로 근무했던 때에도 금요일은 애틋한 날이었다. 신혼집을 부산에 두고 나는 야탑역 근처의 원룸텔을 잡아 출퇴근을 했다. 아래층과 좌우 건물이 모두 노래방인 원룸텔의 소음에 적응하기까지는 한 달이면 충분했지만, 주중에 아내를 보지 못하는 것만은 3개월 내내 적응이 되지 않았다. 우스갯소리로 결혼하자마자 주말부부가 되는 건 3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던데, 우리 부부는 떨어져 지내야 하는 상황이 너무 힘들었다. 딱히 신혼이라거나 깨가 쏟아져서는 아니고 성향이 원래 그런 탓이다. 우리는 미워도 서로의 얼굴을 봐야 마음이 편한 부부다.


판교에서 나는 매주 금요일 저녁 수서역에서 부산역으로 가는 SRT를 예매했다. 가끔 일이 늦게 끝나면 밤 10시 이후 기차를 타야 했지만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매주 왕복 기찻값만 10만 원이 더 들었지만 그것도 아깝지 않았다. 보고 싶은 사람을 볼 수 있다는 건 확실한 행복이니까. 판교에서 출퇴근하며 근무했던 3개월 동안 단 한 주도 빠지지 않고 그렇게 성남과 부산을 오갔다. 부산에서는 다시 성남으로 가기 싫어 기차 예매를 몇 번이나 취소하며 시간을 미뤘다. 그러다 월요일 새벽 첫 기차를 타고 수서역에 내리자마자 회사로 출근한 적도 있었다. 그런 날엔 당연히 체력이 축났지만 마음만은 후회스럽지 않았다.


연애하던 대학생 때나 직장 생활을 하던 신혼 때나, 금요일은 보고 싶은 사람을 볼 수 있는 날이었다. 보고 싶은 사람과 하고 싶은 이야기를 밤새 주고받아도 피곤하지 않은 날이었다. 일주일 치의 그리움을 상기된 얼굴로 쏟아내는 날이었고 하루쯤 양껏 취해도 걱정 없는 날이었다. 그런 금요일이 없다면 사람들은 외로워 죽을지도 모른다. 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


요즘은 다시 부산에서 프리랜서로 이런저런 작업들을 한다. 그중에서도 지금 쓰고 있는 일간 에세이는 돈보다도 용기가 더 필요했던 프로젝트다. 매일 쓴다는 행위는 작가로서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반드시 즐겁다거나 수월하다는 뜻은 아니니까. 고민 끝에 나도 일간 에세이 연재를 시작했고, 오늘은 그 첫 주가 마무리되는 금요일이다. 구독료를 낸 독자들에게 내 글이 보고 싶은 글, 읽고 싶은 글이면 좋겠다. 월요일엔 월요병을 덜어내는 글, 수요일엔 hump day를 떠올리게 하는 글, 금요일엔 유난히 더 반가운 글이면 좋겠다.


이번 주도 열심히 잘 살았다, 맥주 한 모금 마시면서 술술 읽어내릴 수 있는 그런 글이면 참 좋겠다.


2020年 7月 31日, 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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