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年 8月 3日의 기록
2020년 8월부터 2021년 1월까지,
6개월 동안 구독자 분들께 이메일로 연재했던
일간에세이를 브런치에 공개 연재합니다.
1년 전 이맘때의 제 기록들을 통해
1년 전 독자분들의 나날을
되짚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하를 막론하고 초면에 반말을 듣는 건 기분 나쁜 일이다. 누구에게나 자신이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은 불쾌하니까. 나이가 벼슬인 줄 아는 어르신들은 2020년에도 여전하다. 시간의 흐름이 내면의 성장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건 자명하면서도 안타까운 일이다. 음식점에서 직원들에게 “어이, 소주 좀 가져온나.”라고 외치거나 신발 가게에서 대뜸 “발 편한 신발로 260 사이즈.” 하며 의자에 앉는 모습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손님은 서비스나 상품을 이용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고, 직원은 그에 상응하는 서비스나 상품을 제공하는 것이 기본적인 세팅이다. 그 세팅에 나이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저들 딴에는 친근감의 표시인지 몰라도 듣는 사람은 불쾌하다. 한쪽이 불쾌하면 다른 한쪽이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상식적인 수순이다. 심지어 친근하지도 않다. 언제 봤다고 반말이란 말인가.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아버지뻘 택시 기사에게 반말로 시비를 걸고 욕지거리를 하는 청년들. ‘고하를 막론하고’라는 말은 나이가 적든 많든 상대방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런 자들에게 손님이라는 말은 아까우니 손놈이라 부르자. 손놈들의 웃기는 특징 중 하나는 정작 남에게 반말을 듣는 건 아주 불쾌해한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내로남불인데 딱하고 답답하다. 서로 존대하면 간단히 해결될 일인데. 그런 손놈의 사례를 접할 때마다 그들은 남을 내리깔지 않고서는 자존감을 지켜낼 자신이 없는 부류라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초면이 아니어도 반말보다 존댓말이 더 편할 때가 있다. 직장 동료처럼 완전히 사적인 관계가 아닐 때, 나이는 자신보다 어리지만 지인의 지인(예를 들어 친구의 아내라거나)일 때에는 존댓말이 편하다. 편하다는 건 ‘스스럼없다’는 의미 외에도 ‘각자의 선을 넘지 않는다’는 안정감을 내포한다. 나는 한 살이라도 많으면 아무리 가까워도 반말을 하지 않는다. 군대식 ‘다·나·까’ 화법처럼 딱딱한 어투는 아니고 가벼운 ‘해요체’ 존대를 기본으로 한다. 그 정도 어투로도 편한 대화가 충분히 가능하다.
당연히 친구나 가까운 후배들과는 반말로 대화를 한다. 다만 흔히 경상도 남자들이 서로를 함부로 대하거나 비속어를 섞어 대화해야 진짜 친한 거라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진절머리가 난다. 나는 가까울수록 더 세심하고 다정하게 말해야 한다고 믿는다. 함부로 반말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애인이나 아내, 친한 친구에게 편안함을 명분으로 생각 없이 말을 뱉고 싶진 않다. ‘우리 사이에 이 정도 말은 당연히 이해해야지.’라는 태도는 이기적이고 위압적이다. 이해는 강요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말이라고 다 편하지는 않다.
나는 빈말을 못하는 편이었다. 못한다는 말도 맞고 하기 싫어한다는 말도 맞다. 물론 사람 면전에다 직언만 쏘아대진 않는다. 적당히 동조하고 적당히 침묵하는 건 할 수 있다. 하지만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를 마치 진심인 양 꾸며대는 건 아무래도 어렵다. 굳이 내가 잘 보이려고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과 내가 던진 빈말이 상대방에게 진심으로 가닿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빈말이 사회생활의 중요한 처세술이라는 지적에는 동의하지만 뭐랄까, 나도 알고 너도 아는 빈말을 주고받는 핑퐁은 정말 지루하다. 특히 상하 관계에서 아부성 빈말을 하고 나면 가벼운 자괴감마저 든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기분. 빈말을 할 바에야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여겼을 때도 있다. 진심이 담긴 메시지를 전하는 것만이 의미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요즘은 생각이 좀 바뀌었다. ‘빈말의 호의’를 경험하며 어쩌면 말의 의미는 받는 사람이 채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대학 시절 나는 선후배와 딱히 교류가 없었다. 애살맞게 선배와 가까워지려는 성격도 아니었고 후배들을 살뜰히 챙기는 선배 노릇도 하지 않았다. 그럴 시간에 글을 쓰고 운동을 하고 데이트를 하는 편이 좋았다. 축구 동아리나 글쓰기 소모임 활동을 하며 선후배들과 친분은 쌓았지만 개인적으로 연락을 하거나 만나지는 않았다. 그러다 보니 졸업 이후에 자연스레 각자 삶을 사느라 멀어졌다. 가끔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덕도 내 덕, 탓도 내 탓으로 여기며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도 꼭 연말연시나 명절, 내 생일 때가 되면 몇몇 후배들이 안부 메시지를 보낸다. 처음엔 색안경을 끼고서 ‘아이고, 뭐 이런 걸 보내냐’ 싶은 생각을 했다. 당연히 고맙긴 한데 뭔가 부담스러운 느낌. 빚을 갚는 기분으로 나도 정성껏 답장을 보냈다. 그 뒤로도 그 후배들은 명분이 생길 때마다, 가끔은 아무 명분도 없이 살가운 안부 메시지를 보내왔다. 뻔한 빈말이 가득할 때도 있었고, 정말 내가 생각나서 보낸 것 같은 메시지도 있었다.
누군가의 생각을 바꾸는 데에는 훈육이나 교육이 아니라 역지사지의 경험이 더 효과적이다. 나이 든 사람의 생각을 바꾸고 싶다면 더욱 그렇다. 누군가 내게 빈말의 중요성을 강조하거나 내 성격을 타박했다면 나는 더 편협한 태도로 빈말을 경멸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빈말의 호의를 경험해보니, 이게 생각보다 괜찮았다. 그 메시지들이 빈말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심지어 100% 빈말이어도 상관없었다. 때때로 나는 그 빈말에다 나름의 의미를 채워 힘과 위안을 얻었다. 그러면서 ‘내가 예의상 그냥 던진 빈말도 누군가에겐 이렇게 힘과 위안이 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말에 담긴 진심의 농도는 말을 뱉을 때 결정되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 진심으로 뱉은 말도 때로는 공허하게 읽히고, 건성으로 뱉은 빈말도 때로는 큰 울림을 준다. 상대방을 응원하는 말, 잘 될 거라며 희망을 전하는 말, 아직 괜찮다는 위로의 말들은 설령 빈말이어도 좋다. 귀로 듣고 눈으로 읽은 말과 글은 기억의 땅에 조용히 내려앉는다. 당장은 눈에 띄지도 않는 그 말과 글의 씨앗들은 때가 되면 의미의 싹을 틔운다. 말과 글은 그때서야 온전해진다.
요즘 나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좋은 빈말을 하려고 노력한다. 모순적이지만 빈말을 정성껏 하려고 한다. 물론 진심을 담아 얘기할 때도 있지만 빈말이 더 잦다. 경우 없는 반말은 줄이고 다정한 빈말은 늘려야지 하고 다짐한다. 빈말보다 나쁜 건 옹졸한 내 고집을 지키려 입을 꾹 닫아거는 침묵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반말과 빈말만 잘 다뤄도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일은 줄어들 것이라고 믿으면서. 말과 글의 힘을 새삼 실감하면서.
2020年 8月 3日, 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