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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빈 Apr 18. 2016

아무도 시를 말하지 않는 곳에서

누가 문을 열어주었으면

  시를 읽거나 쓰는 일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해 나름의 이유를 지니고 살았던 때가 있었다. 그 이유란 것들은 대부분 거창한 것들이었다. 예술로서의 시, 인간 내면의 관념을 형상화하는 언어의 아름다움, 은유의 더부살이 같은 것들.


  그러나 결국 나는 인정해야만 했다. 이 시대에 시를 읽거나 쓰는 일은 무용한 일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그것은 돈이 되지 않는다. 등단을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능력'으로서 인정받지 못한다. 그저 병약한 예술가의 넋두리쯤으로 치부될 뿐이다. 게다가 대한민국에서 이십 대 중후반의 나이에 아직도 시에 미련을 두고 있다는 것은, 멍청할 뿐 아니라 무책임한 짓이기도 하다. 돈을 번다고는 해도 겨우 내 밥벌이만 해내서는 아직 인간 구실을 한다고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그런 나날을 보내던 중, 우리 학과의 작가 초청회에 김연수 소설가 분이 강연을 오셨다. 내가 사회를 봐야 했기에 김연수 소설가의 여러 책을 급히 읽어 내렸다. 시인으로 먼저 등단했다고 하는 김연수 소설가는 소설과 산문집뿐만 아니라 시인들의 시를 엮은 책도 냈는데 그중 한 권이 <우리가 보낸 시간들> 이었다. 그 책의 서문에는 이런 말이 적혀있었다.


시를 읽는 즐거움은
오로지 무용하다는 것에서 비롯한다.
하루 중 얼마간을 그런 시간으로 할애하면
내 인생은 약간 고귀해진다.
우린 무엇을 향해 가길래
이렇게 하루가 빠르고
무엇인가 자꾸 허전한 걸까.
오로지 무용한 시 읽기로
내 삶이 조금만 더 깊어진다면.


  그리고 아래의 시는, 김연수 소설가의 이 고마운 문장을 읽기 전 카페에 앉아 시집을 읽다가 썼다.

  시를 읽고 있는 스스로가 가엾고 원망스러워서.



                                                                                                                             

아무도 시에 대해 말하지 않는 곳에서
 
존나, 씨발, 비속어와
과제와 취업과
군대와 여자친구 또는 남자친구와
경박스러운 웃음소리,
커피 원두가 갈리는 소리와
가방 지퍼를 잠그고 풀썩, 소파에 주저앉자
찢어진 레자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공기의 탄식
그러나 아무도 시에 대해 말하지 않는 곳에서
뜻 모를 시집을 펼쳐 읽는다.
딱히 시를 사랑하여 그러는 것은 아니고
그저 손톱을 물어뜯는 일처럼
맛도 없는 문장을 질겅일 뿐인데
이 순간이 고요하다.
고요함이 덧없음이 되는 것은 찰나의 일
이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한 톨 쌀알만도 못한 단어들이
사랑의 위장, 그 허기를 어떻게 달랠 것인가
아무도 시에 대해 말하지 않는 곳에서
겨우 펼쳐보는 시집의 페이지는
마치 겹겹이 잠겨있는 문들
나는 정신병동의 나일론 환자
누가 문 좀 열어주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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