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팬이 된다는 것

그 대담하고 멋진 일에 대하여

by 김경빈

아주 오래전부터 누군가의 열렬한 팬이 되는 일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팬클럽에 가입하고, 무대를 쫓아다니며 응원하고, 각종 굿즈를 사들이고, 사인회에서 입을 틀어막은 채 감격과 동경의 눈빛을 내비치는 그 감정 말이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 걸까. 초등학생 때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1분 만에 쫓겨난 적이 있다. 벽에 붙은 H.O.T 브로마이드를 보고선 별생각 없이


“야 문희준 손가락 뭔데? 가위손이가? 으, 강타는 눈빛이 너무 느끼한 거 아이가? 김치 먹고 싶어지네.”


라고 했는데, 순간 방문이 벌컥 열리며 친구의 누나가 뛰쳐나왔다. H.O.T의 광팬이었던 누나는 발악하듯 욕을 뱉었고 친구와 나는 허겁지겁 도망쳐 나왔다. 좋아하는 연예인을 조롱했으니 당연히 화가 날 만도 하지만, 한편으론 굳이 그래야만 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연예인이 뭐라고 저렇게까지 화를 내는 걸까. 미안함과 억울함이 뒤섞인 감정으로 친구와 골목을 배회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물론 나도 좋아하는 연예인이 있다. 배우 중에선 공유, 황정민, 조정석, 김태리, 김혜자 등등. 가수 중에선 이문세, 나얼, 강산에, 아이유 등등. 사실 ‘등등’으로 얼버무린 연예인의 수가 너무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좋아하는 작가도 있다. 박준, 김연수, 무라카미 하루키, 이슬아, 한수희 등등. 하지만 나에게 그들의 팬이냐고 물으면 왠지 머뭇거리게 된다. 작품 속 그들의 모습, 그들이 부른 노래, 그들이 쓴 문장들을 좋아하긴 해도 덜컥 팬이라니. 굳이 대답한다면 “좋아하긴 하는데요, 팬은 아닙니다.”라고 할 수밖에.


팬이라기엔 좋아하는 사람의 수가 너무 많다. 수많은 연예인 각각의 열렬한 팬이 되는 것도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 그래도 누군가의 ‘팬’이라고 하면 어쩐지 그에게 온전히 마음을 몰아줘야 할 것만 같다. 게다가 나는 그들의 팬클럽에도 가입하지 않았고, 무대나 시사회를 쫓아다니지도 않으며, 굿즈는 단 한 번도 사본 적이 없다. 아무래도 팬이라기엔 자격 미달이다. 나는 그들을 좋아하긴 해도 팬은 아닌 것이다. 사실 팬이 아니어서 아쉽거나 억울한 것도 전혀 없다. 누군가의 열렬한 팬인 자가 누리는 행복과 그 누구의 팬도 아닌 자가 느끼는 무심함은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각자 온전하다. 새삼 그 균형이 놀랍다.


나는 사람을 대할 때도 거리감을 신중하게 조절하려는 경향이 있다. 대체로 만인에게 친절하지만 쉽게 속내를 풀어놓지는 않는다. 빈틈없는 친절은 오히려 단호한 거절이 되기도 해서, 가까워지기 싫은 사람 앞일수록 깍듯해진다. 웬만큼 친하다는 친구들에게도 함부로 대하거나 굳이 망가진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반드시 흑역사를 공유해야만 진정한 친구고, 쌍욕을 섞어 대화해야만 편한 사이라는 태도도 별로다. 좋아할수록 다정하게 대하고 싶다. 가까울수록 세심하게 배려하고 싶다.


대학 신입생 때 함께 마시고 취했던 형은 입대 전 나에게 “나는 맨날 네 앞에서 토하고 울고 그랬는데, 왜 너는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냐.”며 서운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내가 그 형을 형식적인 관계로 여겼던 건 아니다. 만취한 형을 매번 뒤치다꺼리하며 보살피면서도 한 번도 미웠던 적이 없었다. 엄밀히 따지면 우르르 몰려다니던 무리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내 태도는 형을 서운하게 만들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그를 좋아하긴 해도 팬은 아니었던 셈이다.


이런 성향 탓에 나를 둘러싼 인간관계는 지극히 좁고 깊다. 절대 마당발은 못 될 팔자다. 대학 동기 J와 고등학교 동창 K와 W, 나를 Bro라고 부르는 L형과 친구에서 가족이 된 처제까지. 본가의 가족과 아내를 제외하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 100%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을 꼽자면 겨우 이 정도가 전부다. 언제고 아무 때나 만나도 좋은 사람들이기도 하다. 핵인싸가 아니어서 아쉽거나 억울한 거라고는 내 글이 더 많이 읽히지 않는다는 사실뿐이다. 내가 만약 SNS 인플루언서였다면 구독자가 훨씬 더 많지 않았을까. 그럼 혹시 내게도 팬이 생기지 않았을까. 그 누구의 팬도 아닌 자가 품기엔 너무 염치없는 상상인가.


누군가의 팬이 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호감이 생긴다고, 마음이 동한다고 무작정 팬이 될 수는 없다. 내 생각에 팬이 되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건 용기다. 좋아한다는 마음만으로는 부족하다. 팬심은 호감보단 사랑에 가깝다. 특히 나 같은 인간에겐.

아니,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건 확실히 사랑이다. H.O.T를 사랑하지 않고서야 친구 누나가 그렇게 발악했을 리 없다. 누가 면전에서 부모를 조롱하고 아내를 욕한다면, 나도 그렇게 발악했을 테다. 더 혼쭐을 내줬을 거다. 그러고 보니 나도 이미 오래전부터 누군가의 팬이었다. 감사함과 죄송스러움을 품은 부모님의 팬, 열렬한 사랑을 주체하지 못하는 아내의 팬.


이런 생각에까지 이르니 더더욱 연예인이나 작가의 팬이 될 마음이 들지 않는다. 이쯤이면 됐다. 더 이상 또 누구에게 이 마음을 몰아준단 말인가. 내 마음은 그리 넉넉하지 않다. 다만 열렬한 팬의 마음, 팬심을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겠다. 한때 의아해하고 때로는 한심하게 여겼던 누군가의 팬들에게 사과하고 싶다. 그 팬심, 그 사랑, 그 용기에 작은 응원을 보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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