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을 넘기며 드나드는 카페, 술집 등의 분위기도 바뀌었다. 특별히 고급스러운 곳을 찾아다니는 것은 아니다. 맛도 중요하고 분위기와 청결, 최근의 트렌드, 모두 중요하겠으나 무엇보다도 저속한 말들이 들리지 않는 곳이면 좋다. 내 돈 주고 앉아서 옆 사람이 하는 쌍욕까지 들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말들은 욕 없이도 충분히 저속하다. 뉴스에서 온통 칼부림 난동으로 시끌벅적할 때, 어깨를 으스대며 “야, 칼부림은 돈이 된다니까. 지금 호신용품 팔면 존나 대박이야.”라고 말하는 장사치의 말이 그렇다. 사회의 변화와 소비자의 니즈를 파악해야 하는 비즈니스의 특성상,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나도 잘 안다. 호신용품 팔아서 돈 버는 게 잘못도 아니다. 오히려 사회 전체적인 관점에서의 후생을 증진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저속할 필요가 있을까. 굳이 그렇게 인격의 밑바닥을 드러내는 말로 자기 얼굴에 똥칠할 필요가 있느냔 말이다. “칼부림 사건 때문에 사람들이 호신용품에 대한 니즈가 많아졌다. 호신용품을 팔면 사람들도 자기 안전을 지킬 수 있고 우리도 보람 있게 돈 벌 수 있다.” 뭐 이런 식의, 최소한의 인간 존엄을 지키며 말할 수는 없는 걸까. 그러나 어떤 인간들은 이런 생각을 ‘위선’으로 치부한다. 결국, 돈 벌자고 하는 짓인데 뭘 그렇게 착한 척을 하느냐고 말한다. 그들은 모르는 것이다. 결국, 돈 벌자고 하는 짓에도 ‘격’이 있다는 것을. 그것은 그 행위 자체가 아니라, 행위자의 신념과 성품과 말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이런 말을 하는 나도 욕을 추임새처럼 쓰던 시절이 있었다. 중고등학생 시절,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욕은 대수롭지 않은 표현이었다. 씨발, 존나, 지랄, 개새끼, 이런 단어들은 욕이라기보다는 문장의 뉘앙스를 완성하는 문법적 요소에 가까웠다. 그나마 나는 친구들에 비해 욕을 덜 쓰는 편이었는데도 그랬다. 그 시절의 욕은 감탄사였고, 부사였고, 동사였고, 대명사였다. 즐거움과 짜증과 만족감과 후회를 아우르는 간편한 단어였다. 친밀함을 확인하는 원시적인 발성이자, 적대감을 드러내는 동물적인 포효이기도 했다. 사태의 본질을 적확하게 꿰뚫는 신중한 언어가 아니라,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사태의 외연을 상처 입히고 왜곡하는 무책임한 말이었다.
그랬던 내가 한순간에 욕을 쓰지 않기로 다짐한 것은 대학생이 되고부터였다.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는 일은 삶이라는 무대의 새로운 막을 여는 것 같은 긴장감을 준다. ‘어제까지는 열아홉이었지만 오늘부터는 스물’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긴장되는 일이었다. 조금 더 성숙한 인간이 되어야 할 것만 같았고, 그 첫 번째 단계가 바로 ‘성숙한 말’을 익히는 것이었다.
대학교에 입학해보니 씨발, 존나, 지랄, 개새끼를 습관처럼 쓰는 대학생들은 의외로 많았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 그건 내 모습이기도 했는데, 마음속에서 이상한 거부감이 일기 시작했다. 우린 이제 고등학생이 아니라 대학생인데, 성인인데, 계속 저래도 되는 걸까. 더 성숙한 말이 필요한 거 아닐까. 이제는 그 저속한 말들과 이별하고, 내 마음과 생각을 조금 더 섬세하고 정확하게 표현할 언어를 찾을 때가 된 것이 아닐까. 이를테면, ‘어른의 말’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언어를 말이다.
이십 대의 나는 함부로 말하지 않으려 노력했고, 말하기보다는 읽거나 듣는 일에 조금 더 집중했다. 감정의 형태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짜증인 줄 알았던 것은 사실 후회였고, 미움인 줄 알았던 것은 사실 부러움이기도 했다. 저속한 말들과 이별하면서, 나는 나를 더 잘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게 됐다. 말이란 결국 마음을 빚어내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욕이 필요한 순간은 있다. 욕이야말로 가장 명확한 마음의 형태일 때가 그렇다. 욕이 아니고서는 전달되지 않는 뉘앙스가 있고, 현실을 고증하기 위해 욕이 필수적일 때도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조폭이 교양과 배려가 넘치는 말로 대화한다면 설득력이 떨어질 것이다. 심지어 악인을 처단하는 과정에서 쏟아내는 욕 세례는 듣는 이에게 카타르시스를 전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존재들이 그렇듯, 욕에도 명암은 있다.
문제는 무분별한 욕지거리다. 그건 자신이 처한 상황과 그때의 마음을 면밀히 살피지 않는 나태함의 발로다. 발작적으로 튀어나오는 욕으로는 상황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마음도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욕으로 대충 얼버무린 화법은 오해로 이어지기 쉽다. 특히 가까운 사이일수록 그렇다. 친구나 연인, 가족에게 더욱 신중하고 사려 깊은 언어가 필요한 이유다. 나의 가장 사랑하는 친구와 아내와 가족에게, 나는 장난으로라도 욕을 쓰지 않는다. 편하게 대하는 것과 함부로 말하는 것은 동의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걸 깨닫지 못하면 언제까지고 ‘나는 솔직하고 쿨한 사람’인데, 그걸로 상처받는 ‘상대방은 답답하고 위선적인 사람’이라며 남 탓을 하게 된다.
존재의 격은 대부분 보거나 들을 수 없는 관념에 의지한다. 교양, 배려, 예의, 그 밖의 여러 철학적이고 사상적인 관념들. 그런 관념들은 보거나 들을 수 있는 행위로 이어졌을 때 비로소 증명되고 힘을 얻게 된다. 사랑한다는 마음이 ‘사랑한다’는 말로 드러날 때, 사랑하므로 할 수 있는 행동으로 표현될 때 ‘사랑’이 증명되는 것이다. 무책임하고 저속한 과거의 말들과 이별하고 더 성숙한 말로 마음을 빚어낼 때, 우리는 그저 ‘말을 더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더 깊은 사람’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