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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빈 Apr 15. 2016

차라리 눈에 파묻혀 죽기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위로하는 일에 관해

  8년의 연애,라고 하면 어쩐지 영화 제목 같이 들린다. 실제로 <6년째 연애 중>이라는 영화도 있으니까. 다만 그 영화가 비극이라는 것과 달리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연애는 여전히 행복하다는 점에서 다르다. 호르몬의 과다분비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아직까지도 내 여자친구를 보면 설렌다. 민낯으로 잠든 얼굴을 보고 있는 일은 마치 작은 꽃잎의 결을 살펴보는 일처럼 조심스럽고 또, 행복하다.


  그리고 이쯤 되니, 사랑이라는 비이성적인 활동의 로맨틱함을 조금 알 것 같다. 할 수 없어서 부탁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 몰라서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 서로에게 서로가 필요한 존재임을 부단히 실감해나가야 사랑이 소중해진다는 것. 애초에 사랑이란 아무 쓸모없는 것들이 아름다워지는 마법 아닌가.


  해서, 서로를 필요나 효용 혹은 이성과 합리의 기준으로만 바라보기 시작하면 사랑은 식는다. 한 겨울에 내리는 눈을 보고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애인을 두고 교통혼잡을 먼저 언급하는 순간 사랑은 식는다. 본인의 잘못인 것이 확실한 데도 눈물을 흘리는 애인에게 잘잘못을 따지는 순간 사랑은 식는다. 교통혼잡을 몰라서, 제 잘못을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우선, 웃어보고 안아보고 들어보는 일이다.



                                                                                                                                                           

 눈에 파묻혀 죽기로 한다
 
 몰라서 울었던 것은 아니었다
 내 슬픔을 소매치기하듯 슬쩍해주길
 잃고 싶었던 것을 잃게 해주길
 그런 식의 기대가 얼마나 헛된 것인지
 몰라서 너에게 달려간 밤은 아니었다
 이 겨울, 추위를 몰라서 눈이 내리는 것 아니듯
 내 삶의 얼룩은 결국 내가 지워야 함을
 몰라서 너에게 물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아무 말 않고 함께
 내리는 눈을 바라봐줄 수는 없었을까
 눈이 쌓이는 소리를 들어줄 수는 없었을까
 미친 척 나의 눈밭에 뒹굴어주지는 못하더라도
 그냥 봄이 올 때까지
 묵묵히 겨울을 기다려주었다면
 
 눈을 치우느라 바쁜 너를 남겨두고
 나는 차라리 눈에 파묻혀 죽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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