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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빈 Feb 02. 2018

나도 서른이 된다.

서른과 어른, 겨우 자음 하나 다를 뿐인데. 

                                                            

서른 즈음엔, 모든 게 멀어져 가는 줄로만


사람은 기본적으로 ‘현존’ – 즉 ‘현재에 존재하지’ 못하는 성향이 있는 것 같다. 태어나고서부터 줄곧 더 빨리 자라기를 바라며 미래를 꿈꾸다가, 문득 ‘너무 빨리 시간이 흘러버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과거를 자꾸 들춰본다. 그리고 이러저러한 군상들 중에서도, 나처럼 애늙은이 행세를 해온 인간은 보통, 오지도 않은 미래를 미리 살아보며 청승을 떠는 버릇이 있는 편이다.


내 이십 대가 딱 그랬다. 아직 군대도 가기 전, 그러니까 이십대라는 문을 막 열어젖힌 그 순간부터 나는 노래방에서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불러댔다. 우습게도 가끔 울컥하는 바람에 노래를 이어가지 못하기도 했다. 겨우 ‘스물몇 살의 나’ 가 상상했던 ‘서른 즈음의 나’는 도대체 얼마나 보잘것없고, 불쌍했길래. 겪어보기도 전에 저 혼자 미래를 앞당겨 살았던 탓에, 내 이십 대는 늘 고단하고 걱정이 많았다. 청춘(靑春)의 푸르름이 마치 푸른 멍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 시절 나는, 김광석의 노래 가사처럼 서른 즈음이란 모든 게 멀어져 가는 줄로만 알았다.


진짜 내일모레면 서른


그랬던 내가 군대를 다녀오고, 대학을 졸업하고, 이러저러한 일들로 밥을 벌어먹고 살다가, 이제 진짜 내일모레면 서른이 될 시기에 이르렀다. 며칠 전엔 스물아홉 번째 생일을 맞이했고, 이제 약 두 달 뒤면, 나는 서른이 된다. 이십 대, 그 시절의 내 청승대로라면 이제 내 인생은 거의 끝난 것이나 다름없어야 하는데, 정작 나는 아주 건강하고 활기차다. 물론 몸무게가 15kg쯤 더 불어났고, 세상을 바라보는 순수함은 얼마간 사라져 버렸지만, 편협했던 마음에 여유가 생겼고, 내가 부족한 부분에 대해 괴로움 없이 겸손하게 배울 수 있는 자세도 갖추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제 와 이십 대를 돌이켜보면, 막 억울해지는 거다. 이러나저러나 살다 보면 결국 서른이 될 텐데, 되어보고 나니 내 서른 즈음은 그런대로 괜찮은데, 뭣하러 나는 내 이십 대에 서른을 위해 슬퍼했나. 차라리 그럴 시간에 이십 대의 객기나 무모함, 열정을 더 불태울 걸.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처럼, 과거의 나를 차원의 먼발치에서라도 다시 볼 수 있다면 나는 이렇게 외쳐주고 싶다. “야! 그럴 시간에 나가서 어디든 여행이나 가! 방구석에서 청승 떨지 말고!!”


아홉수, 끝이면서 시작인 어떤 경계에서


흔히들, 아홉수엔 조심하라고 한다. 결혼, 이사 같은 개인이나 가족의 큰 변화를 피하라고. 난 그런 걸 딱히 신경 쓰거나 귀담아듣는 편은 아니지만, 어떻게 살다 보니 내 스물아홉엔 결혼도, 이사도 없었다. 다만, 개인적으로 내 인생에서 가장 바쁜 한 해였다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 하려는 노력 없이도 여러 가지 일들을 할 기회가 쏟아졌고, 일 욕심 반, 돈 욕심 반으로 거의 대부분의 일들을 해냈다. 하루 2~3시간 밖에 자지 못하는 날들이 며칠, 몇 주간 이어지기도 했고, 멘토라고 불러도 될 만한 분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살다 보니, 스물아홉이 이제 겨우 두 달밖에 남지 않았다. 당장 12월 초까지도 바쁠 예정이라, 정말 내 인생의 스물아홉은 ‘아홉수’라는 걸 의식할 겨를도 없이 지나가버렸다.


9는 그 자체로 한 자리 자연수의 끝이면서 동시에 두 자리 자연수의 시작인 경계에 선 수다. 실질적으로 우리 나이에서는 앞자리가 바뀌는 것을 불혹, 지천명, 이순 같은 이름으로 부르면서 나름의 의미를 부여한 반면에, 뒷자리에는 9를 제외하곤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 아마, 아홉수 다음엔 결국 다시 새로운 ‘대’의 0부터 시작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내 ‘이십 대’는 이제 막을 내렸고, 곧 ‘삼십 대’의 막이 오를 차례다. 서른, 스스로 우뚝 서 자립할 때라는 ‘이립(而立)’으로 불리는 바로 그 삼십 대가.


이제야 좀 사람답게, 나답게


내 이십 대를 그렇게 보내고 난 후, 내 스물아홉을 이렇게 보내고 난 후, 이제야 좀 사람답게, 나답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서른이니까, 이제 시작이니까. 서른엔, 서른을 살아야지. 서른둘엔 서른둘을 살고, 마흔은 마흔이 되었을 때 살아보면 되니까! 요새 유행하는 YOLO, 뭐 그런 건 아니다. 멀든 가깝든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계획하는 건 필요하니까. 다만, 지금에 충실하지 않으면, 또 후회하게 될 테니까.


해서, 서른을 앞두고 있는 나는 당장 2018년부터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또 포기한 것보다 더 많은 것들에 도전할 계획이다. 살면서 처음으로, 다이어리를 쓰고 싶어 졌고, 처음으로 버킷리스트를 적었다. 서른을 이렇게 기대하고 설레어할 줄, 스물몇 살의 나는 결코 상상도 하지 못했겠지. 어리석었던 ‘이십 대의 나’여, 네가 그토록 걱정하던 내가 곧 서른이 된다. 나도 서른이 된다. 10년쯤 뒤, ‘불혹의 나’여, 걱정 말고 기다리게, 나 열심히 살아서 너를 만나러 갈 테니.




이 글은 칸투칸 8F 칼럼으로 최초 기고된 글입니다.

http://8f.kantukan.co.kr/?p=6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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