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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빈 Feb 02. 2018

가상의 세계에서 실존하기

비트코인 안 해서 다행이다. 사실할 줄 몰라서 다행이다. 

                              

인터넷 전문 은행의 돌풍


카카오 뱅크, 케이 뱅크 등을 필두로 한 인터넷 전문 은행이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4차 산업 혁명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기 몇 년 전부터 곧 사라질 직업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은행원’이 정말 사라지는 건 아닐까. 사실 ATM이 보편화된 이후로 꾸준히 언급된 이야기였어도 체감하기는 어려웠는데, 아예 오프라인 지점이 불필요한 인터넷 전문 은행이 등장하면서 문득, ‘머지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7월 27일 첫 영업을 시작한 카카오 뱅크는 불과 한 달 만에 300만 계좌를 넘어섰고, 케이 뱅크도 현재 50만 계좌 이상이 개설되었다고 한다.(2017년 12월 기준) 참고로, 우리나라 은행 전체의 연간 신규 계좌 수가 18만 정도라고 하니, 사실 말도 안 될 정도로 폭발적인 성장세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별명이 ‘근대 남성’ 일 정도로 최신 기술이나 IT에 취약한 나도 슬슬 인터넷 은행을 이용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


다수의 매체는 인터넷 전문 은행 호황의 원동력이 ‘사용자 중심 전략’, 즉 편의성에 있다고 평가했다. 개발자가 고문관이라는 농담이 나돌기도 했던 PC의 ‘Active X’ 나, 공인인증서 인증 프로그램 같은 것들이 ‘사용자’의 입장에서 얼마나 번거로운지는 모두 겪어봤을 터. 간결하고 직관적인 인터페이스와 결제 방법, 거기다가 특유의 캐릭터를 통한 문화 코드를 적용하면서 도저히 시중 은행들이 쫓아갈 수 없는 속도로 입지를 굳히고 있다.


가상의 세계는 거기 없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은행 시스템이란 ‘가상의 세계’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의 계좌에 1억이 있다는 것은, 사실 1억이라는 금액이 통장이나 명세서, 은행 어플의 계좌 조회 화면에 적혀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지, 지금 내 눈 앞에 1억 원어치 지폐 뭉치가 실존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나마 기존의 은행은, 간판이 있고, 내 두 발로 걸어서, 문을 열고, 창구에서 은행원을 만나는 ‘실존’의 경험을 할 수 있는 정도는 됐는데 인터넷 전문 은행은 이제 그 존재 자체가 ‘가상의 세계’ 이기 때문에, 우리는 온전히 우리의 자본을 가상화 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가상의 세계를, 가상의 은행과 가상의 잔고를 믿을 수 있는 원동력은, 그것이 실제 세계의 일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단지 숫자일 뿐인 그 가상의 금액으로 우리는 대금을 결제하고, 차나 집을 산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를 지탱한다. 결국 이 가상이 실제로 작동한다는 경험이 뜬구름 같은 세계를 믿는 원동력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가상의 세계가 얼마나 허무하게 황폐화되는지도 알고 있다. 몇 차례나 보도되었던 은행의 개인 정보 유출 사건이나, 보이스피싱 사기를 통해 불과 몇 분만에 전 재산을 잃는 그런 일들 말이다. 만약 전 재산을 현금으로 ‘실존케 하는’ 세계라면, 오히려 더 안전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적어도 한 번에 수백, 수천 명의 돈이 동시에 도둑맞는 일은 없을 테니까. 모든 일이 그렇듯, 명암이 있다. 다만 가상의 방식이 ‘안전성만 확보된다면’ 훨씬 더 효율적이고 편리하다는 이유로, 우리는 계속 우리 삶에서 가상의 세계를 확장시킨다.


결국 가상일 수 없는 단 하나


그래서, 사실 우리는 아주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것처럼 보여도 일면 그렇지 않은 부분이 많다. 우선 어떤 이유로든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가상’을 믿는다는 것부터가 그렇다. 찾아가서 따질 수도 없는 인터넷 전문 은행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 일은 제쳐두더라도, 종교를 믿는 일, 사랑을 믿는 일, 모두 일종의 가상을 믿는 일이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가상 세계의 붕괴를 감수하고서라도, 우리는 어떤 가상을 믿으며 살아간다. 아, 어리석고도 가련한 인간이여.


자, 너무 멀리까지 가버린 듯한 이야기를 급히 마무리해보자. 아무리 내 별명이 ‘근대 남성’ 이라지만, 우리 삶을 더욱 편하게 해주는 기술 앞에서 흥선대원군처럼 ‘디지털 시대에 대항하는 쇄국 정책’ 같은 걸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 또한 그런 기술들 덕분에 효율적인 삶을 살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발달된 기술들로 시공간의 제약 없는 ‘가상의 세계’를 마음껏 누리는 인간의 가장 큰 역설은, 끝끝내 스스로 가상이 될 수 없는 단 하나가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인간 스스로가 가상이 되어버리는 순간, 세계의 주체는 더 이상 우리가 아닐 테니까.


그러므로 역설적이게도 이 가상의 세계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가 ‘실존’하는 일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실존의 감각’을 유지하는 것에서부터 ‘가상 세계’의 유용성과 낭만이 가능해진다. 우리는 가상을 위해 존재하는 실존이 아니라, 실존을 위해 가상을 믿는 존재들이니까. 나는 오늘도 내 손에 실존하지 않는 카드 속 잔고로 월세를 냈다. 그 숫자들로 맛있는 저녁을 먹고, 로또라도 사는 날에는 믿지도 않는 신에게 로또 당첨을 부탁했다.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사랑 덕분에 팍팍한 실존의 삶에 낭만이 가득하다. 어디까지나, ‘실존하는 나’로서 모든 가상의 세계를 믿기에 가능한 일들이다.




이 글은 칸투칸 8F 칼럼으로 최초 기고된 글입니다.

http://8f.kantukan.co.kr/?p=6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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