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힘들어도 생계는 꾸려야 하는 어른의 삶
어릴 때 기억이다. 우리 엄마는 7남매 중의 맏이였고, 그 덕분에 나의 성장기에는 늘 4명의 이모와 2명의 외삼촌이 함께였다. 특히 나이 스물에 엄마가 나를 낳으셨기 때문에 여섯째, 일곱째인 두 외삼촌과는 나이 차가 겨우 9살, 8살밖에 나지 않아서 거의 형제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지금의 내가 내 동생과 8살 터울인 걸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렇다. 집안의 첫 외손자였던 나는 성장기 내내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다만, 이모들마다 또 외삼촌마다 그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서로 다 달랐다.
안경 이모(둘째 이모의 별칭), 냠냠 이모(셋째 이모의 별칭)와 공주 이모(다섯째 이모의 별칭), 그리고 큰외삼촌, 이렇게 넷은 나에 대한 애정을 ‘애정’ 그대로 드러내 주었다. 집에서는 엄마가 못 먹게 하셨던 라면을 끓여준다거나, 각종 군것질을 사다 주고, 수시로 용돈을 줬다. 생일이며 크리스마스, 어린이날마다 선물을 사다 줬다. 반면에 야시 이모(넷째 이모의 별칭)와 막내 외삼촌은 내가 받아들이기 괴로운 방식으로 애정을 드러냈다. 흔히 하는 말로 ‘너무 예뻐서 깨물어 주고 싶다. “고 할 때, 이 둘은 진짜 깨물어버리는 쪽이었다고 하면 되려나. 놀리고, 꼬집고, 놀라게 하고… 특히 막내 외삼촌은 간질이기로 나를 수도 없이 울렸다.
그 정도가 거의 고문에 가까웠는데, 사람이 계속 간지럼 태우는 것을 당하면 처음엔 실성한 듯 웃다가, 나중엔 애원하며 울고, 마지막엔 거의 비명을 지르게 된다. 그러다 오줌도 여러 번 지렸다. 그렇게 막내 외삼촌의 과격한 애정 표현이 한바탕 끝나고 나면 땀, 눈물범벅이 된 채로 햄버거나 과자, 라면 같은 걸 먹었다. 나를 괴롭힌 막내 외삼촌이 미워죽겠다가도, 울고 나면 꼭 그렇게 허기가 졌다.
초등학교(입학 당시만 해도 국민학교였는데…)에 입학하기 전까지, 그렇게 나를 무지막지하게 사랑해줬던 이모들과 외삼촌들 덕분에 배가 찢어지도록 웃어볼 일도, 한바탕 시원하게 울어볼 일도 많았다. 이후 내가 8살이 되던 해에, 늦둥이 남동생이 태어났다. 나는 내 동생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나도 어린애였는데, 엄마가 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고는 분유도 타다 먹이고, 기저귀도 갈아주고, 안아서 바람도 쐬고, 말 그대로 ‘애가 애를 키우며’ 동생을 애지중지했다.
그러는 동안에 나도 모르게 나는 ‘장남 콤플렉스’ 비슷한 걸 온몸으로 익혀왔던 걸까. 돌이켜보면, 당장 초등학교 3학년쯤부터 해서, 내 인생에 한바탕 시원하게 울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그렇다고 늘 행복했던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뭔가 서럽고, 가슴께부터 목구멍까지 뜨거운 것이 왈칵 차오를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울음을 참거나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꺽꺽 울었다. 내뱉지 못하고 되새김질하듯 집어삼켜야 했던 울음의 맛은 쓰고 비렸다. 더 억울한 건, 그렇게 울고 나서도 허기가 진다는 거였다. 하지만 몰래 울고 난 뒤 퉁퉁 부은 눈으로 천연덕스럽게 부엌에서 뭔갈 꺼내먹을 수는 없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한 살이라도 더 어리다는 건, 우는 것이 조금 덜 부끄러울 수 있다는 건데, 왜 그때 펑펑 울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서른, 어디에서든 목청껏 대성통곡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가 되어버렸다. 다행인 것은, 이 나이엔 눈물이 나 울음의 그럴듯한 변명거리가 충분하다는 거다. 슬픈 영화나 노래, 술, 담배, 또는 ‘서른’이라는 나이, 등등…
그러나, 정반대로 불행인 것도 있다. 어릴 적엔 한바탕 우는 동안에, 또는 울고 나서도 복잡하게 챙겨야 할 일이 없었다. 기껏 해봐야 엄마가 차려준 밥을 야무지게 꼭꼭 씹어 먹고, 구몬 교재를 대충 푸는 정도? 하지만 이 나이엔, 아무리 슬퍼도 침착하고 냉정하게 해내야 할 일들이 있고, 아무리 아파도 데드라인을 넘기면 안 되는 업무가 있다. 그렇게 꼭 해야 할 일을, 어떻게든 책임지고 해내면서 조금씩, 조금씩 어른이 되는 법이니까.
슬퍼진다는 것, 때때로 감성적인 인간이 된다는 건, 펑펑 쏟아지는 눈을 보며 예쁘다고 말할 수 있다는 의미다. 교통체증을 걱정하거나, 얼른 나가서 집 앞을 쓸어야 된다거나 하는 실용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저 하염없이, 눈을 바라보는 것. 바라보며 옛 애인을 떠올리거나, 따뜻한 재즈를 듣는 것. 딱 그 정도로만 존재하는 것. 그러니 ‘감성적인 인간’이 갑자기 일을 해내는 것이 쉬울 리가 없다. 한참 내리는 눈을 바라보던 이가 갑자기 집 밖으로 나서서 할 일을 한다는 것이. 길은 이미 깡깡 얼어있고, 차들도 조심스럽게 서행 중이다.
빙판만큼 미끄러운 슬픔의 길 위에서 내달리기란 누구에게나 어렵다. 그래서 가끔, 슬픔이 미끄러울 땐 날카로운 것이 필요하다. 아무리 슬퍼도 직장으로 향해야 하는 저기 저 사람의 자동차 바퀴에 감겨있는 체인처럼, 우리 존재에도 날카로운 것이 필요하다. 미끄러운 슬픔의 길 위에서도 위태롭지 않도록, 나를 지상에 발 딛게 해주는 아이젠 같은 그 무엇이.
적어도 나에겐, 달리기가 그 ‘날카로운 것’이다. 아이젠이고 자동차 바퀴 체인인 셈이다. 내가 느끼기에, ‘감성적인 상태’라는 건 ‘스스로와 아주 가까운 상태’ 또는 ‘존재 내부에 존재하는 상태’ 쯤인 것 같다. 건조하게 표현하면 ‘자아도취’ 같은 표현이 되겠지만, 요점은 현상을 객관적으로 보기 힘든 상태라는 것이다. 그럴 땐, 땀을 내며 운동을 하면 스스로와의 객관적 거리감이 생기고, 시야가 선명해지는 효과가 있다. 여러 운동 중에서도 특히 달리기가 가장 효과적인 것 같다. 호흡, 동작의 지속성 덕분에 서서히, 서서히 감성과 이성의 밸런스가 맞춰지는 기분이 든다.
물론 감성에 젖은 상태에서 밖으로 나가 달리기란 결코 쉽지 않다. 하기 싫고, 어쩐지 머리가 지끈지끈한 것이 감기가 올 것만 같기도 하고, 그냥 전기장판 틀어둔 이불속으로 들어가 내일은 없다는 듯 청승을 떨다 잠들고 싶은 마음. 하지만 일단 달려보면, 분명 5분도 채 되지 않아 현실을 직시하는 힘이 생겨난다. 특히 꼭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을 땐, 차라리 한 20분쯤 뛰는 편히 훨씬 효율적이다. 어릴 적이나 지금이나 슬픔에 에너지를 쏟고 나면, 가끔 눈물이라도 흘리는 날이면, 유독 허기가 진다. 하나 다른 점은, 어릴 적엔 그 허기를 누가 채워주었지만, 이젠 스스로 채워야 한다는 것. 이제 슬픔 그 자체보다, 슬픔 이후를 걱정할 줄 아는 나이가 되었다. 장례식장에서 먹는 육개장 맛을 아는 나이, 미끄러운 길 위에서 스스로 날카로워질 줄 아는, 그런 나이가.
이 글은 칸투칸 8F 칼럼으로 최초 기고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