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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빈 Feb 02. 2018

조연이라는 풍경

가장 마지막에 잊히는 것이 풍경이야.

                                                           

제38회 청룡영화상 


연말이 다가오면서 이제 슬슬 각종 시상식 릴레이가 시작되려 한다. 며칠 전, 제38회 청룡영화상도 그런 시상식 중 하나였다. 다만 이번 청룡영화상은 조금 남다른 파장을 낳았다.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 송강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 나문희보다도,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배우 진선규에게 더욱 많은 이목이 집중된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미 주연만큼이나 강력한 흥행 보증수표가 된 명품 조연들도 – 유해진, 박성웅, 곽도원, 라미란, 진경 등등.. – 있지만, 유독 최근 1, 2년 사이 눈에 띄는 조연에 대한 관심과 언급이 많았던 것 같다. 덕분에 허성태라든가, 최귀화, 엄태구, 그리고 이번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의 주인공 진선규까지 꽤 많은 ‘연기파 조연’ 들의 이름이 알려지기도 했다.


세상의 많은 일들이 그렇듯, 영화나 연극 또한 한 명의 인기 배우, 주연으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 물론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이미 예전부터 ‘내 마음속 애정 하는 조연’ 들의 얼굴 정도야 익혀두는 분들도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주연에만 관심을 가져왔다. 심지어 영화 포스트를 봐도, 부러 찾아보지 않고서는 비중이 적은 조연의 이름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다, 근래 들어 갑자기 ‘조연들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름은 존재의 선명도


‘굳이 이름을 몰라도, 유명하고 인정받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하는 속 편한 생각을 하는 분들은 없었으면 한다. 우선 배우나 코미디언이나 가수나, 연예인이라는 것이 대중의 인기와 인정을 밑천으로 작동되는 직업이고, 그 인기와 인정의 시발점이 바로 이름을 알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코미디 프로그램의 코너에선,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신인, 또는 비인기 코미디언들의 이름을 여러 번 언급하거나, 이름으로 장난을 치는 경우도 있다. 그들 나름의 생존 전략이자, 서로를 위한 최선의 배려인 셈이다.


물론 중간에 꽤 특이한 경우는 있었다. 일명 ‘서프라이즈 걔’로 불리던 재연배우 이중성. ‘이중성’이라는 이름 자체가 그리 흔하지도 않을뿐더러 유치하더라도 동음이의를 활용하면 얼마든지 각인시킬 수 있는 이름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나름의 유명세를 얻기 전부터 ‘서프라이즈 걔’로 통했다. 그 덕에 SNS상의 유행어 아닌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이중성’이라는 이름을 그의 별칭인 ‘서프라이즈 걔’보다 더 알리지는 못했다. 지금은 이수완으로 개명하고 홈쇼핑 업계에서 활약하고 있다 하니, 그의 노력과 도전에 박수를 보내기는 하지만, 안타깝게도 배우로서 그의 존재는 그리 선명하지 못했다.


이렇듯, 얼굴만 보면 누구나 다 알만큼 유명하고 대중적인데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으면 그 존재감은 힘을 잃기 마련이다. 이름은 존재의 선명도이기 때문이다.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을 인용하는 진부한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우리네 일상생활에서도 이름으로 불리는 것과 직급이나 직책, 소속으로 불리는 것의 격차는 아주 크다. 그런 관점에서, 근래의 영화계는 바야흐로, 조연 배우들의 존재감이 선명하게 윤곽을 드러내고 있는 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주연에 대한 열망, 조연에 대한 공감 


조심스레 추측하건대, 이런 세태는 어쩌면 보다 사회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보통, 뛰어난 인물에 대한 동경이나 열망의 기저에는 ‘저렇게 되고 싶다, 저렇게 되고 말 거야.’ 같은 염원, 의지가 있기도 하고 ‘나는 저렇게 될 수 없으니, 상상이라도 실감 나게 하자.’는 식의 대리만족이 있기도 하다. 어느 쪽이든 나쁘다고 할 것은 없지만, 적어도 그런 인물, 영화에 빗대자면 주연에만 집중하는 현상은 우리네 삶 도처에 존재하는 조연의 존재들을 잠시 잊거나 부정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조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세태는 바로 그런 ‘주연에 대한 열망’의 에너지가, 지금에 와서 ‘조연에 대한 공감’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드러난 양상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자조와 좌절의 저성장 시대, 인내, 노력이라는 이전의 성공방정식을 맹신할 수 없는 시대, 성공학만큼이나 실패학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진 시대. 물론, 우리는 우리 삶의 변치 않는 주연이긴 하지만,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조연일 수밖에 없기도 하다. 예전의 고성장 시대나, 그 시대의 향수가 일면 가능성으로 여겨지던 때까지는 ‘그래, 지금은 비록 내가 이렇게 살지만 인생 역전을 해내고 말 거야.’라는 믿음과 의지가 가능했는데, 이젠 그마저도 체념하게 되는 시대가 되었다.


오죽했으면 긍정적 에너지를 듬뿍 담아 현재에 충실하자는 ‘카르페 디엠’으로 시작했던 구호가 ‘내일은 없어, 오늘을 즐겨, 인생 한 번 뿐이니까’라는 ‘YOLO’ 로 넘어와, 최근에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좇는다는 ‘소확행’으로 흘러오게 되었을까. 영화를 관람하던 이들은 이제, 영화 속 조연들을 보며, 끝내 조연일 수밖에 없고, 조연으로 만족하며 행복을 찾아가야 하는 스스로의 처지와 무의식적으로 공감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추측을 해보곤 한다.


조연은 풍경이다.


사회학적으로 그리 신빙성이 있거나, 무슨 근거를 댈 수 있는 그런 추측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나 스스로에 대해선 납득 가능한 추측이다. 이미 톱스타나 다름없는 주연 배우들의 수상 소감과 눈물보다 조연 배우의 수상 소감이, 그 떨림과 겸손, 소박하지만 꾸준한 삶이 더 내 마음을 뜨겁게 하니까.


주연이 세계를 이끄는 서사이자 사건이라면, 조연은 그 서사와 사건을 돕는 ‘풍경’이라는 생각을 한다. 병풍 같은 수동적인 존재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오래전, 최소한 당신의 기억 속에서 가장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보라. 거기에는 디테일한 서사나 대사 같은 것들이 아니라 ‘어떤 풍경’ 이 남아있을 것이다. 그 날의 날씨, 소리, 온도, 그 사람의 표정, 외투, 손을 잡던 촉감 – 그런 풍경들이.


그러니까 사실 삶이란 건, 늘 풍경 속에서 벌어지고, 풍경 속에서 희미해져 간다. 그런 의미에서 조연을 ‘풍경’이라고 표현한 건, 그 순간에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기도 하지만 영화라는 러닝타임만큼의 세계를 든든히 떠받치고, 풍성하게 만드는 풍경이기 때문이다. 조연의 한자어를 살펴보려고 검색을 했다가, 동음이의어인 조연(朝煙)을 찾았는데 공교롭게도 그 의미는 ‘아침에 하늘에 끼는 연기’ 또는 ‘아침밥을 짓는 연기’였다. 


아, 상상만으로도 애틋하고, 차분한 풍경이 아닌가.




이 글은 칸투칸 8F 칼럼으로 최초 기고된 글입니다.

http://8f.kantukan.co.kr/?p=6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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