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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크덕 Nov 07. 2019

출생, 그 경이로움 앞에서

호박이 출생일기 Day 1


새벽 5시,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와이프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샤워를 하러 나왔다. 평소 출근하는 날과 다르게 알람이 울리자마자 일말의 뒤척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새 속옷을 챙기고 화장실로 향했다. 지금 선택한 속옷을 언제 갈아입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내가 아는 한 가장 헐렁한 속옷을 챙겼다. 목욕재계를 하는 것 마냥 가능한 구석구석 씻고 나왔다. 어젯밤부터 계속된 약한 긴장감이 마치 옛날 회사 면접을 보러 가는 날처럼 비장한 느낌이 들었다.


와이프를 깨우고 혹시 빠진 것은 없는지 캐리어와 가방을 살피고, 밤사이 충전한 충전기를 돌돌 말아서 가방에 넣었다. 긴장을 풀기 위해 TV를 켰지만 평소 이 시간에 TV를 보지 않던 터라 예능도 아닌, 뉴스도 아닌 애매한 방송이 오히려 거슬렸다.


택시를 부르고 병원으로 향했다. 40주 거진 10달 전부터 오고 가던 병원인데 오늘이 대망의 D-Day라는 생각에 여간 새로운 기분이 드는 것이 아니다.


병원 지하 통로를 통해 5층 분만실로 이동하고, 와이프가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태아의 심박수를 체크하기 위한 기계를 장착하는 동안 분만실 밖 소파에 앉아서 멍하게 있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15분이 지나고, 간호사의 입실 허락에 드디어 캐리어와 배낭을 지고 우리 분만실로 향했다. 한쪽 구석방에서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고 가는 것을 보았다. 504호, 우리에게 주어진 분만실로 들어가는 순간 침대에 누워있는 와이프가 그리고 그 긴장한 얼굴이 보였다. "무서워". 분만실과 분만실 사이 얇은 벽은 다른 산모의 고통에 가득 찬 소리를 막지 못했고, "아파요, 너무 아파요"라고 덜덜 떨면서 나오는 목소리도 걸러내지 못하고 고스란히 나와 와이프에게 전달되었다.


"괜찮아". 전혀 괜찮지 않은데 할 수 있는 말이 이것밖에 없었다. 겁에 질린 와이프의 발을 주무르면서 토닥거리길 반복하던 때, 마침 간호사 분이 들어오셔서 유도 분만 촉진제를 투여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수액과 촉진제 2가지 비닐에 든 액체가 한 방울씩 바늘을 통해 와이프 팔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촉진제 투약의 단계가 있는지 1단계부터 천천히 단계를 시간이 지나면서 올리고, 와이프는 허리의 뻐근함을 더욱 자주 느끼게 되었다.


9시 30분, 촉진제 투약 최고 단계에 다다르자 와이프가 "아파요"를 나지막이 간호사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손과 마사지 도구를 이용해 허리를 주물렀지만 이제는 마사지로도 아픔을 견디기 어려워졌나 보다. 10시 이제는 와이프가 무통 주사를 찾기 시작했다. 간호사는 조금 더 참으셔야 한다고 하는데, 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안타까웠다.


10시, 무통주사가 허락되고 보호자는 분만실 밖으로 이동했다. 15분 뒤에 다시 들어오라고 한다. 새벽 5시에 일어났다는 피로감이 한순간에 찾아와 어디 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빠르게 병원 옆 카페로 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고, 쭈욱 빨아 당겼다.


약속된 15분이 되기도 전에 분만실 앞에 있었는데, 간호사가 문을 열면서 진통이 시작되었음과 동시에 이제 곧 출산합니다라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허겁지겁 손을 소독하고 실내화로 갈아 신고 들어갔고 이제는 똑바로 눕지도 못하고 아파요를 계속 외치는 와이프가 있었다. 보호자는 멀찍이 머리맡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을 뿐.


아침 회진 때만 해도 원장 선생님은 자궁문이 아직 2cm 밖에 열리지 않아, 오후 4~5시는 되어야 출산할 것 같다고 말씀하셨으나 무통주사를 맞자마자 급격하게 이완되기 시작해서 벌써 8cm라는 말을 들었다. 3번의 출산교실을 거치며 출산 임박 시 자궁문이 10~12cm 임을 알고 있기에 예상치도 못한 초반 러시 마냥 머리가 하얗게 되었다.


힘주기 시작합니다. 간호사의 구령에 맞춰 호흡과 힘주기를 시작했고, 전쟁 같은 상황처럼 간호사의 말은 명료하고 누구나 이해하기 쉬웠다. 호흡 하나, 둘, 한번 더, 자 힘! 하나, 둘, 셋, 넷... 좀 더 좀 더... 똥 싸듯이 힘을 줘! 와이프는 팀장 간호사의 손을 꼭 잡고 반쯤 정신줄을 놓을랑 말랑한 채로 구령에 맞춰 움직였다. "산모님 힘을 더 주세요. 애기가 골반 중에 가장 좁은 곳에 있어서 힘들어하니깐 빨리 힘을 줘야 해요." 머리가 골반에 끼여 있다. 당연한 수순이지만 오래될수록 태아의 머리를 압박하기 때문에 뇌로 가는 산소가 부족해질 수 있고, 계속된 압박으로 태아의 고통은 갈수록 커질 수 있다.


12시, "힘을 못주겠어요" 와이프는 지쳤다. 2시간 가까이의 힘주기, 호흡을 반복했는데 어느 누가 지금보다 더 세게 힘을 줄 수 있을까. 나는 머리맡에서 와이프 손을 잡고 "조금만 더"를 외치지만 와이프는 이 목소리마저 거슬리는 것 같다.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와이프가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고, 이 모습이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남자는 뭐 재미만 봤지"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한 어머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나라도 얼마나 내가 얄밉겠는가. 머리맡에 서서 진심 공감하지 못하는 목소리로 호흡, 힘 조금만 더 줘라는 쉰소리나 하고 있으니...


12시 20분 원장님이 들어오셨다. 와이프는 정신이 하나도 없겠지만, 나는 원장님이 들어오시는 것을 보고 이제 정말 막바지구나 이제 곧 호박이를 만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최전방에서 상대편 수비수들을 한숨에 제쳐버리는 메시 같이 고통 속에 빠진 와이프를 구원할 메시아를 보는 것 같았다.


응애, 드라마에서나 듣던 울음소리! 붉은 핏덩이의 아이가 나왔다. 호박이가 나왔다. 아들이 울고 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이런 것이 선배들이 말하는 울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구나. 경이로움, Marvelous. 마블 영화를 보는 것 마냥 삶의 희로애락이 이 짧은 한나절 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한 마을이 필요하다 라는 말처럼 오늘 호박이의 출생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고, 고통을 감내하고, 다리를 힘줘 누르고 했는가. 한 인간의 탄생. 경이롭다는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처음 아이를 봤을 때 순간을 잊지 못한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는 친구의 말이 귓속에 맴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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