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제법 기분 좋게 느껴진다. 유독 더위에 약해 여름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도, 선선한 바람에 지나는 여름이 아쉬운 건 이번 여름이 행복했음을 말해주는 것 같다. 정확히 말하면 이번 늦여름 여행이 참 행복했다.
이맘때면 해외 휴양지로 나가 요시고를 오마주한 바캉스 사진들을 찍어올 줄 알았다. 슬리퍼에 캐리어 하나 끌고 선글라스를 쓴, 상상만으로 설레는 그런 여름 바캉스 말이다. 비행기를 타기조차 어려운 상황에 휴가지로 포항을 택한 건 꽤나 잘한 선택이었다.
포항에서 해외여행의 기분을 맛볼 수 있는 곳들을 다녀왔다. 꿈같은 해외여행을 기대하며, 이국적인 아름다움이 있는 포항의 이색 여행지를 소개한다.
첫 번째 여행지는 포항의 일본이다. 구룡포 시장 뒤, 작지 않은 골목길은 100여 년 전 일본의 가옥거리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동해의 풍부한 수산자원을 수탈하기 위한 전초지로서 많은 일본 어업인들이 종사했던 곳이다. 관광지로 개발된 이곳은 잘 보존되어 아픈 역사를 한 번 더 기억하는 동시에 이국적인 분위기를 느끼기 좋은 여행지가 되어준다.
우리나라는 지진에 대한 위험이 높지않아 목조건물이 많지 않다. 하지만 일본은 지진에 강한 나무를 건축자재로 사용한 목조주택이 많다. 일본인 가옥거리의 건물들은 그당시 일본에서 사용하던 건축자재를 직접 들여와 일본의 건축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현지 재료와 현지 방식으로 만들어 국내에 있음에도 일본의 분위기가 물씬 느껴진다.
외관만 그럴듯하게 보존된 건 아니다. 여느 구옥을 보면, 고풍스러운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현대적으로 꾸며 조화 따윈 신경 쓰지 않는 곳이 많다. 하지만 이곳은 옛것을 간직한 채 보수되어 오래된 일본 가옥의 정취를 한결 더했다.
조금 더 이국적인 분위기를 느끼고 싶다면 [구룡포근대역사관]으로 가보자. 근대역사관으로 쓰이고 있는 건물은 선박업으로 성공한 일본인 '하시모토'가 살림집으로 지은 집이라고 한다.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일제시대 우체국이나 경찰서처럼 관공서로 쓰였던 건물이 아닌, 일반인이 거주했던 집이라 오히려 특별함을 더한다.
100여 년이 지났지만 잘 복원되어 부츠단, 고다츠, 란마, 후스마, 도코바시라 등 일본 가옥의 구조적, 의장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일본 전통가옥을 그대로 옮겨놨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잘 구현해 놓은 근현대역사관에서 잠시 일본 여행을 해보자.
- 주소 : 경북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구룡포리
두 번째 여행할 곳은 포항의 발리다. 여행을 가게 되면 맛집만큼이나 신경 써서 서칭하는 게 지역에 있는 좋은 카페다. 유명한 곳도 더러 들르지만 특색 있는 곳을 주로 찾아가곤 한다.
처음 포항과 발리를 말했을 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나 또한 이곳에 들어섰을 때 예상치 못한 동남아 풍경에 놀랐으니 충분히 이해한다. 매칭은 잘 안됐을지 모르지만 억지스럽게 엮어놓진 않았으니 천천히 둘러보도록 하자.
SNS에서 포토존 하나만 보고 이곳을 픽했다. 2층 높이의 큰 창이 둘러싼 투명한 외벽 내외로 큰 나무들과 식물이 가득하다. 작지 않은 공간이지만 온실 속에 있는 거 같기도, 숲속 한적한 산장에 들어온 거 같기도 해 아늑함을 더해준다.
비를 좋아하지 않지만 이곳에선 비가 생각난다. 마침 부슬비가 내려 촉촉한 식물이 몽환적인 분위기를 더했다. 부슬비에도 분위기가 참 좋았으니 큰 비가 내릴 때는 더 큰 행복이 있을 거라 확신한다. 큰 창으로 떨어지는 비와 나무를 스치는 빗방울은 꽤나 낭만적이니 말이다.
관광지에 있는 카페를 갈 땐 맛을 크게 기대하진 않는다. 오가는 사람이 많기에 상대적으로 맛에 신경쓰기 어려운 걸 알기 때문이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지만, 메뉴를 고를 때 고민하게 되는 건 매한가지. 한쪽에서 키위를 계속 까고 있길래 어디에 들어가는 키위냐고 물으니 빙수에 들어간단다. 그저 키위를 좋아해서 주문한 빙수를 받고 감탄했다. 우유빙수 위에 노란 골드키위가 빼곡히 쌓여있다.
아는 맛이 무섭다고 (읽는 독자들도 아는 맛이기에 예상은 하겠지만) 아주 만족스러운 맛이다. 여러 맛 조합 장인들을 만났지만, 부드러운 우유 빙수와 새콤달콤한 골드 키위 조합을 메뉴로 만든 사장님께 깊은 감사를 표한다. 국밥은 허름한 식당에서 먹는 게 더 맛있듯, 노란 생과일 빙수와 동남아스러운 공간의 조화가 맛을 더해준다.
내부에서 동남아의 한적한 산장을 느꼈다면, 이번엔 휴양지의 느낌을 받아보자. 바깥 테라스는 산뜻하고 편안한 발리의 리조트를 연상케한다. 라탄과 흰 천, 나무로 꾸며 한가롭게 차 한 잔을 들고 볕과 바람을 맞기에 더할 나위 없다. 흰 천과 바람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흰 천과 라탄만 있다면 어디든 여행하는 기분이 들것 같기도 하다.
- 운영시간 : 월~일 10:00 - 21:00
- 대표메뉴 :
동백이빙수 20,000원
- 주소 : 경북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구룡포길 133-1
- 문의 : 054-281-7773
다음 여행지는 포항의 홍콩이다. 사실 포항의 베네치아로 유명해 오후의 볕이 비치는 운하 컨셉으로 소개하려 했다. 여차저차 여행 일정이 미뤄지고 저녁 즈음 도착하니 생각했던 운하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다른 모습이어서 실망했다는 말이 아니다. 생각지 못했던 모습이 오히려 새로움으로 다가왔다. 화려한 조명과 잘 정돈된 산책로는 홍콩의 한적한 밤거리를 떠오르게 했다.
운하 곳곳에 있는 다리와 조명들은 시간에 따라 다른 빛을 띈다. 밤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나 운하의 운치를 더한다. 물길과 화려한 조명이 산책을 부르니 천천히 걸으며 야경을 즐기는 것도 좋겠다.
포항운하의 산책로가 끝날 즈음 포항운하관 전망대가 나온다. 포항의 랜드마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포항제철소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공장이 이렇게 화려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 빛을 담아낸 거대한 제철공장은 강 건너의 거대한 산업도시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늘상 봐왔던 여느 야경과는 달리 이색적이고 이국적이다. 어릴 적 학교 견학으로 공장 내부를 들어간 기억이 있다. 어린 시선엔 그저 거대한 공장이었는데, 10여 년이 지난 지금 본 제철소는 포항의 랜드마크로써 자리를 잘 지키고 있는 듯 하다.
- 주소 : 경북 포항시 남구 희망대로 1040
- 문의 : 포항운하관 054-270-5177
마무리는 한국이다. 사실 이곳 소개를 넣을까 뺄까 고민을 많이 했었다. 이국적인 여행지를 소개하는 편이기도 하고, 굉장히 유명한 곳이기에 진부한 소개가 될까 걱정을 했다. 그치만 필자의 경험을 토대로 생각을 녹여낸 글을 쓰고 있기에, 호미곶을 처음 가본 필자의 시선으로 소개해본다. 또 포항에 왔는데 '상생의 손' 사진 하나쯤은 넣어야 포항 느낌이 물씬 나지 않을까?
앞서 얘기했듯 포항 관광지로 워낙 유명한 곳이지만 필자는 이제서야 가봤다. 처음이지만 이미 알려질 데로 알려졌기에 새로움을 기대하고 가진 않았다. 하지만 늘 그렇듯 유명한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자연경관에 한번, 규모에 한번 감탄했다.
광장부터 주변 해안 도로까지 쾌적한 시설로 누구에게나 편안한 여행지가 되어준다. 상생의 손을 보러 가기까지 꽤나 큰 해맞이 광장을 지나야 하는데, 광대한 광장과 그 위로 보이는 수평선에서 아름다움과 웅장함이 느껴진다.
한반도 호랑이 그림을 한 번쯤은 봤을 거다. 호미곶은 한반도 호랑이 꼬리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곳으로, 동해안 해안 지역 툭 튀어나온 곳에 위치한 한반도 최동단의 땅이다. 한반도에서 해를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해돋이 명소로도 유명하다.
최동단에서 상생의 손 사이로 뜨는 해를 보는 건 경이롭겠지만, 아침잠이 많은 필자는 일출은 부지런한 자의 것이라며 도전할 생각조차 안 했다. 일출을 안 보면 어떤가. 푸른 하늘과 맞닿은 바다 사이, 일렁이는 물결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우니 말이다.
- 주소 : 경북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대보리
바캉스를 떠올리면 8월 초쯤 찌는 햇살에 선크림을 덕지덕지 발라가며 즐기는 여름휴가가 생각난다. 하지만 북적거림을 피해 초가을로 미루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아직 휴가를 다녀오지 못했다면, 혹 색다른 여행을 계획 중이라면 지나는 여름의 아쉬움을 달래줄 포항으로 떠나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