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여행 추천
올해는 유독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자주 시간을 내어 여행을 다녔다. 여행 메이트를 구하는 친구들 사이에선 프로참석러가 됐고, 카메라 갤러리는 계절의 햇살이 물들인 바다와 들판 사진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시간과 돈을 써가며 이곳저곳 기억을 심고 다녔음에도 어떤 여행이 가장 좋았냐는 물음엔 쉬이 답할 수 없었다.
그렇게 올해가 저물어 갈 즈음 고창에 다녀왔다. 가까운 식당에 내려 처음 내뱉었던 말은 '진짜 한적하다'. 그 말 외에는 이 도시를 설명할 수 있는 문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럴 만도 했다. 거리의 사람들은 손을 꼽아가며 셀 수 있을 만큼 적었고 어딜 가던 (거짓말이 아니다) 작게나마 청명한 새소리가 들려왔다. '한적함'. 그런 게 정말 필요했나 보다. 시작도 전부터 '좋다'라는 마음이 든 건 참 오랜만이었다.
고창은 그런 도시다. 한적함이 주는 평화가 기분 좋은 도시. 어딘지 여유롭지 못한 마음의 가을이라면 고창에 가자.
성곽을 보고 싶었다. 삐뚤빼뚤한 돌을 겹겹이 쌓아 도시를 빙 두른 풍경. 과거의 어떤 날과 현재의 사이에 비스듬하게 서 멍하니 가을바람을 맞아보고 싶었다.
고창에도 성곽이 있다. 그것도 무려 두 군데나.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기에 작은 도시에 두 곳이 위치해 있다는 점이 신기했다. 내가 방문한 곳은 무장읍성이다. 사실 무장읍성은 애초 계획에 없었다. 고창읍성을 보고 다른 목적지로 향하는 길에 홀린 듯 시선을 사로잡은 곳이다.
고창의 대표 읍성을 거쳐왔음에도 무장읍성 소개에 시간을 들이고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시선을 사로잡은 객사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 이곳은 조선시대 관리나 사신들이 묵었던 숙소라고 한다. 좌우 대칭미가 돋보이는 건축물과 그 뒤로 펼쳐지는 파란 하늘의 조화가 인상적이었다.
무장읍성은 드넓고 고요하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간격이 넓고, 내부가 아름답게 조경된 덕에 둘러보는 길이 곧 산책길이다. 반짝이는 물비늘에 시선을 빼앗겨 멍하니 풍경을 담던 도중, 뒤늦게 이곳을 뒤덮고 있는 생명들이 전부 초록색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꽃 한 송이도 없이 이런 감동을 줄 수 있는 풍경은 흔하지 않은데. 늦가을의 햇살을 잔뜩 머금은 초록은 여름에 보는 초록과는 또 다른 매력을 지녔다.
경사가 심한 지대를 따라 건축된 고창읍성과는 달리 무장읍성의 내부는 대부분 평평한 지대로 이뤄져 있다. 커다란 그늘을 만드는 오래된 나무와 화단이나 조형물 없이 깨끗한 잔디밭이 어우러져 유럽의 공원 같기도 하다.
성읍 내 왼편에 위치한 연못은 여름이면 무성한 연잎으로 파랗게 물드는데 이 연못에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일제강점기에 학교가 들어서며 연못은 메워졌고 2014년이 되어서야 원래의 형태로 복원됐다고 한다. 놀라운 건, 연못에 물이 고이자 100년 만에 씨가 발아하며 다시 그 자리에 꽃이 피어났다는 것. 기약 없는 만남이라도 묵묵히 재회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걸까. 내가 다 괜히 마음이 시큰해지는 순간이었다.
과거의 쓸모와 오늘날의 쓸모가 꼭 같은 모양은 아니지만 특유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지닌 역사는 짧지 않을 것 같다. 가을의 끄트머리라서 더 좋았던 곳. 찬바람이 매서워지기 전에 꼭 방문해 보길 바란다.
- 주소 : 전북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 149-1
- 문의 : 063-560-8047
이런 곳에 갑자기 귤밭이 있나?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이 어딨냐며 스스로 묻고 답했지만 그 질문이 꼭 과장된 건 아니었다. 멀리서 바라본 주황색 들판은 정말 제주에서 보았던 귤밭을 떠올리게 했으니까.
작지도 않은 들판을 오로지 코스모스 하나만으로 가득 메운 곳. 고창 학원농장에서 운영하는 황화코스모스 밭이다.
'코스모스'하면 자연스레 보랏빛의 꽃송이를 떠올렸겠지만 이곳에서 재배하는 코스모스는 주황색이다. 정말이지 가을의 색이다. 좀 더 화려하고 진한 달맞이꽃을 닮기도 했다. 선선한 바람을 타고 들판 가득 퍼지는 꽃향기에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이곳에서만큼은 사진에 재주가 없는 사람이더라도 마음껏 셔터를 눌러보자. 찍는 모든 순간이 작품이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노을이 지는 시간의 황화코스모스는 두 배로 아름답다. 한 송이, 한 송이 가을의 볕을 충만하게 받아 잘 익은 오렌지색으로 빛난다.
코스모스 밭 근처에는 학원농장에서 운영하는 다양한 꽃밭을 만나볼 수 있다. 꽃이 피지 않는 겨울엔 사방이 온통 투명한 설경으로 색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다고 하니 눈이 내리는 날 방문해 보는 것도 좋겠다. 관람시간 제한과 입장료는 없지만, 해가 짧은 계절이니 너무 늦지 않은 시간에 방문하길 추천한다.
- 주소 : 전북 고창군 공음면 선동리 1011-1
- 문의 : 063-564-9897
여행 계획을 세울 때, 핫플레이스는 일부러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던 날들이 있었다. 남들 다 가는 곳을 방문하는 게 왜 그렇게 자존심이 상했는지. 그땐 '내 손으로 찾아낸 여행지에서 누구보다 특별하고도 유일무이한 기억을 남기리라'하는 고집스러운 마음이 있었다. 지난가을까지만 해도 나에게 핑크 뮬리가 그랬다.
언젠가부터 폭닥한 니트의 계절이 오면 SNS에 하나둘씩 핑크빛 들판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마치 가을이 왔음을 알리는 것처럼. 이렇게 핑크 뮬리는 '가을엔 코스모스'라는 오랜 공식을 지운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상한 고집을 꺾고 올가을엔 나도 분홍색 바다를 보러 나섰다.
고창 시내에서 차로 30여 분을 달려 청농원에 도착했다. 한적한 시골마을에 펼쳐진 평야는 계절에 따라 분홍과 보랏빛으로 물든다. 입장권을 구매해 둘러볼 수 있는 계절은 여름과 가을, 두 계절이다. 가을에는 핑크 뮬리, 여름에는 라벤더와 수국 정원으로 운영한다.
천국에서도 천국이라 부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꼭 이런 그림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구나 싶었던 순간. 실낱만큼이나 얇은 분홍색 꽃잎 결이 하나하나 보일 듯 말 듯 한 실루엣이 매력적이다.
핑크 뮬리의 줄기는 키가 크다. 성인 여성을 기준으로 가슴 언저리까지 올라온다. 그래서 사진을 담다 보면 배경에 함께 걸린 사람들도 다 같이 솜사탕 그릇에 빠진 것 같은 귀여운 그림이 연출되곤 한다. 곳곳에 숨겨진 포토존을 찾는 재미도 있었다.
매번 새로이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핑크. 사진으로 보는 풍경도 훌륭하지만 아무래도 눈앞에서 마주할 때 몇 배는 더 큰 기쁨이 있다. 핑크빛 절경을 놓치고 싶지 않다면 서두르자. 뮬리는 자주색 꽃이 피는 9월부터 11월 초까지가 절정이다.
청농원의 경우, 오는 11월 6일까지 운영한다고 하니 참고할 것. 사시사철 푸르른 나무와 풀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일 년에 며칠 볼 수 없는 풍경은 더더욱 귀하게 느껴진다.
청농원에서는 농원 외에도 머물렀다 갈 수 있는 한옥스테이, 카페를 함께 운영 중이다. 숙박은 공식 홈페이지에서 예약이 가능하다. 이미 11월 예약도 조금씩 들어차는 중이니 숙박 계획이 있다면 참고할 것. 넓은 좌석이 마련된 2층 카페에서는 핑크뮬리를 테마로 한 아이스크림과 라떼도 만나볼 수 있다.
- 이용기간 : (2022년 기준) 9월 16일 - 11월 6일
- 이용시간 : 09:00 - 17:30 (마지막 입장 17:00)
- 입장료 : 5,000원 (14세미만 무료)
- 주소 : 전북 고창군 공음면 청천길 41-27
- 문의 : 063-561-6907
뭐가 됐던 아쉬움이 짙게 남는 것들이 가장 아름답게 기억되는 편이다. 늦가을의 고창도 그랬다. '조금 더 오래 머물다 올 걸 '싶었지만 그런 마음이 남았기에 비로소 완벽한 여행이기도 했다. 하늘은 파랗고 땅이 노랗게 물든 계절도 얼마 남지 않았다. 보물 같은 계절을 여유롭게 느끼고 싶다면 고창으로 떠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