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이제 정말 괜찮아질 거야.

by 유정

내 마음도

내 생활도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던 어느 날이었다.


삶의 평온함을 깨는

차갑고 어두운 불행의 그림자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 그림자는

아빠의 말기암 진단이라는

거창하고도 낯선 이름으로

우리 가족 모두를 감싸 안았고,


우리는 그렇게

낯익은 듯 낯선 병과의 싸움을

시작하게 되었다.


지방에 사시는 부모님은

우리 집 근처의 암 전문 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기 위해

우리 집에 잠시 머물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친정부모님과의 오랜만의 동거,

그리고 병마가 드리워진 아빠의 모습.

그 모든 상황이 낯설었다.


누구나 그렇듯

암이라는 것이

우리 가족에게 올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암이라는 무서운 존재를 맞닥뜨려야 했고,


우리가 그 병의 속성을

알아가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아빠의 몸은 약해져만 갔다.


결국

말기암을 진단받은 지

불과 3개월 만에

호스피스 전원을 권유받았다.


호스피스로 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도 전에

아빠는 우리를 떠나가고 말았다.


모든 것이

갑자기 시작되어

한순간에 끝나버렸다.


지방에서 서울 병원으로 전원,

그리고 다시 호스피스로 가기까지

그 모든 과정이 내 앞에 놓여졌다.


이 상황이 아직 낯설기만 한 나에게

늘 답이 정해져 있는 선택지가 놓였고

나는 그저 그것들을 따라가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항암치료를 하는 동안

노련한 의사 선생님은

중간중간 아빠의 여명을

조심스럽게 알려주었다.


“세 달 남짓으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다음 회진 때는


“두 달도 넘기기 어렵겠습니다.”


그리고


“이 상태라면 이번 달도 넘기기 힘들겠습니다.”


하지만 나에게 그 시간들은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졌고

3개월이라는 시간은

3년만큼이나 긴 시간일 것만 같았다.


아빠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던 나는

방금 전까지 크게 한숨을 내쉬던

아빠의 그 숨이

마지막 숨이라는 것을

간호사 선생님의 안내로 알게 되었다.


방금 전까지 살아 있던 아빠는

그 숨을 마지막으로

고인이 되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너무도 허무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 길로 우리는

아무런 경황도 없이 장례를 치러야 했고

그 과정에서 입관식을 하게 되었다.


아빠를 보는 마지막 자리였지만

거기에 누워 있는 것은

아빠가 아닌 것 같았다.


밀랍인형처럼 변해버린 아빠를 보며

나는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마지막 자리이니

어떤 말이라도 하라고

친척들은 나를 아빠 옆으로 밀어 넣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내 입에서 짧은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아빠, 잘 가.”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 스스로도 놀랐다.


나이가 마흔이 넘은 딸이

아빠에게 하는 마지막 말이

‘잘 가’라니.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은 한동안

내 마음속에 맴돌았다.


장례식이 끝난 뒤

한동안 복잡한 감정 속에서

마음이 힘들었다.


그러던 중

입관식 때 순간 튀어나온

그 말을 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분명 나였지만

지금의 나는 아닌 나.


그 순간을 곱씹다 보니

문득 9살의 내가 떠올랐다.


9살의 나라면

아빠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아빠를 가장 좋아했던 때가

아홉 살 즈음이었으니


어쩌면 내 안에 있던

그때의 어린 내가

마지막 순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마음이 불안정할 때마다 느꼈던

어딘가 미숙한 불안감이

어쩌면 내 안의 어린 내가

아직 충분히 자라지 못해서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을 애도 상담을 받는 과정에서

조금 더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고

나는 그 존재를 인정하기로 했다.


그래서 아직 어린 나를 돌보는 일이

내 인생의 새로운 과제가 되었다.


지금도 나는

내 안의 어린 나를

돌보며 키워가고 있다.


그러자

내 안에서 사라지지 않던 외로움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내 딸을 돌보듯

내 안의 어린 나를 돌보고,

그렇게

내 마음은 조금 더 편안해졌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나를 돌보고

아이를 돌보고

나를 찾아온 사람들의 마음을 살핀다.


마치 돌보는 것이

내 삶의 일인 것처럼

나는 계속 돌본다.


이 돌봄이

앞으로도 오래 이어지기를 바라며

오늘 하루를 살아간다.


그리고

아빠가 떠난 자리에

내 어린 자아가 자리하게 되면서

나는 더 이상

그렇게 쓸쓸하지만은 않게 되었다.


이제는 정말로


“아빠, 잘 가.”


라고 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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