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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뭉치 Feb 03. 2024

2월 3일 일기

노 베어스 포스터
아녜스 V에 의한 제인 B 포스터
추락의 해부 포스터

대전 가서 국가건강검진(이게 정확한 이름인지 모르겠다) 받는 날이었다. 지역마다 있는 한국건강관리협회 지부에서 검사를 받아야 한다. 토요일은 오전에만 운영한다. 인터넷으로 오전 아홉 시 방문을 신청했다. 9시쯤 대전에 도착하려면 청산에선 늦어도 일곱 시 반에는 일어나야 한다. 다행히 잘 일어났다.


걱정할 만한 거리는 딱 한 가지였다. 협회가 숙지사항을 보내줬는데, 지부 쪽이 혼잡하니 웬만하면 대중교통 이용하라는 내용이 있었다. 아니, 얼마나 혼잡하길래? 사실 공주 정도만 돼도 차 대기가 어려운데 대전은 진이 빠질 정도다. 그냥 차 모는 것만 해도 그렇다. 게다가 시골에선 어느 곳이든 무료 주차장이었다. 도시는 공영주차장도 유료니(올해부터 옥천, 영동 공영주차장도 유료화됐다.) 가랑비에 옷 젖듯 돈이 든다.


토요일 오전 대전은 한산했다. 그래도 혼잡한 곳은 혼잡했다. 무작정 지부 주차장으로 가면 어떻게든 답이 나오겠지 생각해 들어갔다. 주차 안내해 주시는 분들이 네다섯 명 정도 있었다. 주차장은 이미 가득 찼고 그 위에 세로주차된 차가 얹혀 있었다. 세로주차를 해도 상관 없는지 이미 세로주차 된 차 앞에 차 대라고 신호하셨다. 키는 차에 두고 검진받고 오라고 하셨다. 너무 혼잡하니 검진받는 동안 직접 정체를 해소하려는 것이다. 생애 첫 발렛파킹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까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과장해서 코스트코 온 것 같은..? 순번표 뽑으니 대기인원 30명이었다. 10분 정도 기다리니 내 차례가 됐다. 국가건강검진은 1층부터 4층까지 올라가면서 여러 검진을 받는 방식이었다. 학창시절 학교에서 받는 건강검진이랑 비슷했다. 시간이 좀 걸릴 줄 알았는데 1시간 만에 끝났다.


대전 오면 뭐라도 하기. 청산 살면서 생긴 습관이다. 고속도로 왕복 통행료 약 6천원에 기름값에 도심운전 하느라 빠진 내 진, 뭐가 많이 있는 대전을 생각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보고 싶은 영화가 있었다. '노 베어스'랑 '추락의 해부'. 아까 대기순번 30명일 때 시간이 좀 남아 두 영화의 상영시간표가 제때 있는지 찾아봤다.


'노 베어스'는 이란 감독 자파르 파나히 감독 작품이다. 전에 이 감독의 '택시'를 봤다. 기억에 이란 정권에 비판적인 영화를 만들다 보니 영화 만드는 것도 금지당하고 구금당했었다. 그래서 카메라를 택시에 설치해 사람들 태우고 일상 이야기 나누는 영화(기억에 약간의 연출이 있었다. 피 흘린 채 쓰러진 손님을 앰뷸런스처럼 태웠는데, 정권에 반발하는 시위하다 공권력으로 진압당해 그랬던 것 같다)였다. 하늘하늘 그저 일상이 흘러가는 것 같지만 '너희들이 아무리 날 억눌러도 영화를 만들겠다는 정신은 죽지 않는단다'라는, 일상 속 위대함을 담은 영화였다. 기억에 이 영화가 칸 영화제에서 수상했는데 감독이 출국금지 당해 시상식에 못 왔던 것 같다.


그리고 '노 베어스'에는 이동진 평론가가 5점 만점 줬다. 부끄럽지만 영화 개봉할 땐 별로 관심 없었는데 그래서 관심이 생겼다. 나는 이동진 평론가에 의지하는 게 조금(아니, 많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영화 한 번 보면 이해하지 못하는 게 너무 많다. 그런데 이 사람은 한 번 봐도 그의 머릿속 빅데이터에서 정리를 끝내는 느낌. 그래서 기대는 지표, 화살표이자 내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자괴감이 좀 든다.


나에게 이동진은 아낌 없이 주는 나무다. 어떤 영화든 모든 부분을 발라내서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내는 사람. 그의 유튜브 채널에 있는 '살인의 추억' 해설 영상을 보고 이렇게 느꼈다. 나는 박평식 평론가도 좋아한다. 그는 살인의 추억에 10점 만점에 6점을 주고 '무난무난하네' 같은 느낌으로 한줄평을 썼다. 그리고 나는 그동안 이 영화의 '밥은 먹고 다니냐'라는 대사와 영화 마지막 장면을 '별 의미 없는데 그럴 듯해 보여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힙스터 뭐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를 찾아봤는데도 이해가 잘 안 됐다. 이 생각은 이동진의 해설로 부숴졌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그를 좋아하고 그래서 '노 베어스'를 보고 싶었다.


'추락의 해부'는 프랑스의 감독 쥐스틴 트리에 작품으로, 작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다. 황금종려상 수상한 세 번째 여성이라고 한다(그럼 두 번째가 '티탄'인가 보네? 티탄도 얼마 안 된 영화인데). 남편, 아내, 아들이 있다. 남편이 갑자기 추락사한 채 발견되고 아내가 살인 혐의로 기소된다. 타살인지 자살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사건인 만큼 치열한 법정 공방이 이어진다는 줄거리다. 흥미진진할 것 같아서 보고 싶었다. 마침 CGV 대전에 이동진의 언택트톡 상영회차가 있었다. 그것도 1시 반.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아주 이동진으로 시작해 이동진으로 끝나는구나... 이렇게 보여도 영화관에서 이동진 해설 듣는 거 생애 처음이다.


'노 베어스'는 상영관이 정말 없었다. 배급사 인스타 보면 '이번에도 상영관 적으니까 발품 팔아주세요ㅠㅠ' 같은 내용이 있다. '추락의 해부'는 개봉한 지 얼마 안 됐고 다양성영화치고 상영관 상영회차 많은 것 같았다. 노 베어스는 나중에 시간 되면 씨네인디U에서 보기로 하고, 1시 반까지 시간이 붕 떠서 그 사이에 영화 한 편 더 보기로 했다.


가장 먼저 씨네인디U 시간표를 봤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였다. 이건 이미 봤다(근데 첫 장면 놓쳐서 다시 보고 싶긴 하다. 다시 보면 처음 볼 때보다 더 웃길 거 같다). '웡카'는 뭔가 보기 싫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듄: 파트2'에도 나올 티모시를 좋아하는 음식 아껴 먹듯 하는 느낌일까..? 그러다 CGV대전에 '아녜스 V에 의한 제인 B'를 봤다. 상영시간이 11시 30분인가 그랬다. 무슨 영화인지 모르겠는데 그냥 이거 봐야겠다 싶었다. 대강 보니 아녜스 바르다와 제인 버킨의 합작품이라고 한다. 아녜스 바르다는 이름만 알았다. 제인 버킨은 이름은 들어본 것 같은데... 였다.


세이백화점은 휑했다. 몰랐는데 역사 깊은 지역 백화점이었다. 수익 저조 등으로 매각돼 점포가 대부분 빠졌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최근 CGV대전과 백화점주의 임대계약에서 CGV가 내야 할 돈 20여억 원을 안 냈다는 기사를 봤다. 이용자는 그나마 남아 있는 백화점 점포에 절반, CGV대전 절반 정도였다.


세이백화점 처음 방문한게 아마 2016년 고등학생 때였다. 청양에서 가장 가까운 아이맥스 관이 있어 여기서 '수어사이드 스쿼드' 본 게 처음이었던 것 같다. 3D 아이맥스였는데 워너브러더스 로고랑 오프닝 자막만 3D였다. 부들부들... 아무튼 이 영화랑 눈 많이 내리는 날 '스포트라이트' 봤고 '너의 이름은'이랑 '재키'도 여기서 봤다. 여기서 영화 엄청 많이 봤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도 여기서 봤나? '셰이프 오브 워터'는 확실히 여기서 봤는데. 백화점 올 때마다 사람이 바글바글했는데 지금은 텅텅 비었다. 대전에서 고향의 모습을 보는 느낌.


메인 점심으론 세이백화점 맞은 편 본죽에서 먹었다(사실 정말 부끄럽지만 본죽 처음 가봤다). 흰죽 정도 빼면 기본 만 원이 넘어갔다. 죽인데 생선국수 두 그릇 값이네..? 라고 생각하며 소고기야채죽 주문했다. 그런데 양이 정말 많았다. 생각이 바뀌었다. 와, 이 정도면 제값이네. 3분의 1만 먹고 나머지 포장했다. 책도 조금 읽으려고 했는데 한 다섯 쪽 읽었나..;


'아녜스 V에 의한 제인 B'는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독특했다. 감독 아녜스 바르다와 배우, 모델인 제인 버킨이 중심인데 극영화와 다큐멘터리가 옴니버스 형식으로 서로 교차하는 느낌이다.  버킨이 바라는 점이나 살아온 삶, 그리고 지금의 삶을 이야기하고 바르다가 그 말에 상상력과 각색을 더해 극영화를 만든다고 하면 좀 괜찮은 설명이려나? 다큐멘터리 부분도 바르다와 버킨의 대화가 뭔가 연기 톤이었다.


기억에 남는 장면은 바르다가 버킨이 너무 아름답다며 그의 나체를 극도로 클로즈업 해 찍은 장면. 이 사람의 가장 세세한 솜털마저 담고 싶다는 카메라의 정신이 느껴진다. 그리고 버킨이 미술품 판매상을 연기하며 극중 화가인 남자친구와 잃어버린 판매 대금을 갖고 서로 싸우는 모습. 버킨이 남자 역할을 하고 싶었다고 말하자 카우보이가 되거나 갑옷 입고 말에 올라타는 모습. 흑백 화면 속 바르다가 찰리 채플린 수염을 한 채, 남장을 한 버킨에게 빵집 일자리를 소개시켜 주겠다며 갔는데 서로 싸우다가 서로 케이크로 뺨 치고 그러는 슬랩스틱 코미디.


그리고 너무나도 솔직하게, 버킨이 바다를 걸으며 자기는 큰 가슴과 마른 남자를 좋아하는데 납작한 자기 가슴이 정말 싫었다고(그래서 남자 역할을 원했던 건가 하는 묘한 느낌도 들었다) 이야기하는 장면. 서로 자녀를 출연시키는 장면. 한 마디로 기상천외한 영화였다. 여러 모로 영화(영화라고 부르기에도 부끄러운 작품들이지만) 만드는 일에 너무나도 자신감을 잃어버렸었는데, 이 영화를 보며 정말 절박하게, 어떤 결과물이 되든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지든 상관 없이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느낀 순간들이 스쳐갔다.


버킨은 어릴 때부터 빛났다. 하지만 빛난다고 모두 스타가 되는 건 아니었다. 그런 존재가 되고 싶어 닥치는 일을 다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잡지를 보며 자기를 성적으로 소모하길 바라는 사진들을 찍었다. 또 연인인 남자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던 사람이었다. 그의 마지막 소망은 누구보다도 빛나는 사람이었기에 오히려 평범하게 보이고 싶다는, 기만에 가까운(?) 것이었다. 영화 마지막은 영화 첫 장면인 첫 극영화와 수미상관을 이루며 스태프와 감독이 버킨의 다가오는 생일을 축하해 주며 끝난다. 이미 전에 서로 영화 작업을 했지만 이 작품으로 몰랐던 부분을 알게 되고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두 사람은 행복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추락의 해부'는 정말 흥미로운 법정영화, 가족영화다. 152분으로 꽤 길지만 막상 보면 그렇게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너무 재밌게(그리고 너무 슬프게) 봤다. 겉으로 평화로워 보였던 가정이었지만, 남편의 죽음과 형사재판으로 이면이 드러난다. 치열하고 마치 패싸움하듯 격렬한 법정공방이 이어진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가려야 하는데, 정황증거만으로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양쪽 모두에 무게가 실린다.


영화 절반 정도가 법정공방 장면이지만, 공방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가장 흥미로운 점이었다. 아니, 무죄인지 유죄인지 가려내야 하는데 그 과정 속 내용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물론 공방 내용으로 관객은 힌트를 얻고 상황을 파악하곤 한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몇 가지 중요한 변론 및 증거물을 제외하면 법정공방은 '양쪽의 입장이 이렇게나 팽팽하다는 것'을 영화적으로 보여줄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영화의 제목은 겉으론 남편의 추락사를 낱낱이 파헤친다는 뜻이다. 숨겨진 뜻은 이 가족관계의 추락, 몰락을 해부한다는 것이다. 가족구성원은 여러 위기 상황을 맞이한다. 절정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네 장면이 있다. 유죄, 무죄 여부와 무관하게 이 장면들로 실마리에 싸였던 점들이 완전히 해방된다. 이동진의 해설을 듣고 나니 영화를 다시 보고 싶고, 다시 보면 후반부 결정적인 장면에서 많이 울 것 같다.


이동진의 해설과 별개로 내가 느낀 점을 적어봤다. 아내는 주위에서 어쩌면 그렇게 자기밖에 모르냐고, 자기를 다른 시각으로 보라고 말을 듣는다. 이 말을 실행하듯 카메라는 여러 모습으로 변주해 아내의 모습을 담는다. 경찰의 현장검증 영상, 방송기자의 인터뷰 영상, 혹은 1인칭 시점 숏, 피사체와 투명 벽을 사이에 두고 촬영된 장면 등. 어쩌면 아내가 영화 속 주요 사건을 겪으며 다른 시각으로 자기를 바라보게 되는 영화이자 그를 다른 시각으로 보면서 제한된 정보로 가치 판단하는 대상은 관객인 우리인 영화가 아닐까. 애초에 세상에 진실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데, 어떤 걸 사실인 것처럼 판단해 버리고 판단의 결과물인 옹호와 혐오를 일삼는 우리에게 일갈하는 것 같은 영화였다.


영화 끝나고 이동진의 언택트톡이 있었다. 원래는 라이브톡이라고, 서울 영화관에서 직접 GV를 진행하면 그걸 여러 지역의 같은 상영회차에 생중계하는 식이었다. 아마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언택트톡이 생겼을 거다. 언택트톡은 미리 촬영한 영상을 틀어주는 식이다. 라이브톡은 GV니까 실시간으로 질의응답을 할 수 있는 반면 언택트톡은 그럴 수 없다.


언택트톡 영상 분량은 1시간 반 남짓이었다. 외부 유포가 금지돼 있어 녹취만 했다. 와 이 사람 진짜 말 잘하네? 진짜 영화 분석 잘하네? 와 이 장면이 좀 걸렸는데 이런 뜻이었어? 첫 장면은 기억도 안 나는데 뭐였지? 아 이거였구나! 와 이게 이런 뜻이었어? 와 영화를 이렇게 본다고? 와 이건 생각도 못 했는데 이런 의미를 담고 있었다고??? 보면서 그런 생각이었다. 이동진 진짜 대단하다 하면서 스스로 큰 자괴감을 느꼈다. 당신. 내가 똑똑히 말하는데, 언젠가 당신에게 기대지 않는 날이 올 때까지 노력하겠어. 살아있는 동안 그럴 수 있을 지 잘 모르겠지만.


쓰다 보니 온 세상이 이동진이다. 옛날에 영상으로 많이 접했지만 요즘은 거의 안 그러고 다른 평론가분들의 글을 읽곤 한다. 특정 평론가의 글만 읽는다기 보단 한 영화의 다양한 해석을 보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해부한다는 시점에서 평론을 접하다 보면 돌고 돌아 이동진이다. 솔직히 나는 혼란과 진실 없는 이 세상에서 착한 학생 컴플렉스가 있는 것 같다. 선생님이 '이 문제의 답이 뭘까요?'라고 물으면 누구보다도 정답을 빨리 말해야 한다는 강박. 세상에 정답은 없다. 이러다간 신기루 찾아다니는 삶이다. 변화가 필요하다. 다음 글은 영양 가득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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