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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경혜 Sep 05. 2024

에트나 화산에서 사랑을 외치다 2편

정상에 오르다

여행할수록 중요시되는 것이 바로 체력이다. 날씨 탓도 있겠지만 정신적인 피폐로 인해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서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분화구를 품은 땅을 훑으며 올랐다.


하지만 점점 미소가 번진다. 병든 육체와 정신은 분리되어 영혼을 뒤흔든다. 다리에 힘이 풀려 땅만 보고 걸어도 굉장했기 때문이다. 이대로 내려간들 아무도 손가락질하지 않는다만 스스로에게 창피한 일이다. 비바람이 부는 궂은 날씨에 멀쩡히 씩씩하게 오르는 사람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나는 오르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다.


남편 또한 무언 속에 속마음을 감춘 채 저벅저벅 산기슭을 오르는 모양새다.



땅을 주시하다 보니 별의별 것이 눈에 다 들어온다. 삶은 달걀을 까먹고 남겨진 껍질이 마치 비료 같기도 하다. 화산재가 굳어 손아귀에 쥘만한 돌멩이가 되었고 누군가는 그것을 예술로 만든다.


인간이라 가능한 지구별 여행. 고도가 높아질수록 인간은 한 줌의 모래알처럼 작아 보인다. 그에 반해, 자연은 광대해 멀리서 볼수록 거대해진다. 자연의 이치에 다가가면 점점 작아지는 인간이다. 스스로 자연이 되고자 다짐한 지 1년 채 되지 않았다. 흘러가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 역시 자연이고 새싹과 꽃이 피는 것도 동일할 것이다.

 

동일선상에서 남편의 등짝을 바라봤다. 어쩌면 먼지보다 분자보다 작을 병충해에 불과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소한 것에 매달리고 울부짖는 일 역시 자연을 거스르는 것일지 모르기 때문에 욕심을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늘은 점차 개고 있었고 땅은 여전히 잿빛이었다. 해발 3,350m 지점은 가이드와 동행해야 했기에, 주제에 맞는 작은 분화구를 퀘스트로 지정했다.

화산재에 운동화가 푹푹 빠지고 바람이 불어 코 밑이 거무칙칙해져도 포기하지 않았다. 경사가 심해질수록 미끄러지고 비틀거렸지만 곧은 의지로 나의 정상에 오르고 있었다.


마음을 내려놓으니 하늘의 먹구름이 걷히고 청량한 푸른색 물감을 뿌린듯한 광경이 펼쳐졌다. 코끝을 스치는 불쾌한 냄새로 정상에 도달했음을 알았다.



에트나 산에는 총 4개의 주요 분화구(Crater)와 약 300개에 달하는 측면 분화구가 있다. 정상에 위치한 기존 분화구가 가장 먼저 생성되고 꾸준한 화산활동으로 다른 분화구들이 출현하면서 그 개수도 변화하고 있다. 에트나 화산은 해마다 새로운 분화구를 낳고 있으며 그 형태도 다양해진다.

참고로 시칠리아 방언으로 분화구를 'puttusiddi'라고 하는데 작은 구멍이라는 뜻이다. 화산학자들이 애정을 담아 붙인 이름이다.


우린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증기활동 중인 작은 분화구에 도착했다. (정확히 말해 지나가는 행인의 도움으로 이곳을 추천받았다.) 해발 2,500m에 달하는 휴게소에서부터 느림보로 40분 정도 걸은 것 같다.


누런 유황냄새가 코를 찌르는 순간이다. 들끓는 지구 그리고 활발한 화산 활동 중인 에트나 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인지 모를 가스가 나오는 지점에 섰다. 해발고도에 높아질수록 기온은 떨어지기 때문에 따뜻한 증기를 내뿜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증기에 휩싸이니 누런 냄새는 한증막 속 뜨거운 공기로 느껴졌다. 조심스레 36도 정도 되는 손을 땅에 가져다 댔다. 따뜻해서 눕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토록 뜨거운 화산이라니!'


조용히 먼발치서 춤추는 안개인지 모를 가스를 바라보며 화를 삭였다. 나 대신 씩씩대며 울부짖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진정되고 평화가 찾아왔다. 때마침 단 둘만 분화구 바닥에 앉아 있었고 하늘과 맞닿은 연기를 보니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순간임을 깨달았다.

뾰족하게 솟은 가시도 발현됐다 사라질 연기 같았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소용돌이를 헤치는 것도 결국엔 우리라며 순종하기로 했다. 연락처를 동기화하듯 숨 막히는 경치를 바라보며 함께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산은 오르는 사람에게 영광을 안겨준다. 보상이 따르는 것이다. 인생을 놓고 영순위 가치에 심혈을 기울이다 보니 욕심과 이기심이 앞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약 돈이 먼저였다면 치열하게 싸우지 않았을 것이다. 또 이번 여행은 없었을 것이다. 심장이 멎을 만큼 충격적인 찰나의 순간을 같이 걸었을 뿐. 폭풍우가 휘감고 벼락이 쳤지만 결국 맑은 날이 찾아온 것이다. 발아래 놓인 세계를 다지기 위해 미친 듯이 싸웠다.


용암이 들끓는 활화산은 말한다. 마그마가 터질 때 분노에 차지만 분출하지 않으면 존재의 의미가 없다고. 변화를 모색해 새로운 얼굴을 만든다고. 관계의 심화과정은 불같이 싸우며 서로를 알아가는 것이라고. 그 과정을 통해 배려를 배우고 자만을 버릴 수 있다고. 갑과 을은 평행선상에 서서 치열하게 이해하고 내 안에 나를 낳는 과정을 통해 보듬어진다고. 무한대, 즉 정의되지 않은 세계를 갈망하며 사랑도 자유임을 깨달을 때가 가장 높은 곳에 오른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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