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백수의 하루

by 정경혜
나는 백수다.

백수는 사회에 소속되지 않은 존재다.
한가한 낮시간 멍이라도 때리면 한심한 인간이라 손가락질을 한다.

분명 나는 쉬지 않았는데 말이다.



[현대백수의 생활계획표]

오전 9시 기상 및 간단한 세수

오전 9시 30분 경제뉴스 시청, 주 3회 빨래하기

오전 10시 30분 브런치, 커피 즐기기

오전 11시 30분 도서관 또는 카페 (도서관은 매주 월요일 휴무다)

오후 12시 글쓰기 등 부업

오후 4시 귀가 전 장보기

오후 5시 저녁준비

오후 6시 저녁 먹기

오후 7시 샤워하기

오후 8시 영화, 유튜브 등 자유시간 보내기

오후 9시 책 읽기

오후 10시 취침예상


단언컨대 백수는 바쁜 일과를 보낸다. 백수이기 때문에 가족들 중 문제가 생기기면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은행 등 관공서 업무도 담당한다. 그리고 평일 특수를 누려 원하는 가전가구를 언제든 주문해 설치할 수 있다. 백수는 언뜻 자유로워 보이지만 그 속에 구속이란 것이 존재한다. 백수가 된 이후로, 가장 실증난 일은 가족을 도와주는 것이었다. 갑작스레 부탁을 하는 횟수가 늘어났고 자연스레 일상은 부차적인 것이 되었고 쓸모를 강요당했다.


현대사회와 자본주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전통사회는 대가족 문화가 자리한 데 비해, 핵가족 시대에 들어서면서 1인 가구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가까운 미래에는 핵개인의 시대가 될 것이다. 물가는 점진적으로 오를 것이고, 기술은 이미 인간을 점령했다. 현실적으로 부모님 세대는 당장 통장 잔고를 걱정해야 하기에 자식들에게 물려줄 자산은 없다시피다. 현대 기준, 동수저는 부모가 자식들에게 기대지 않는 것이고, 은수저는 부모가 자식을 책임질 수 있는 것이고, 금수저는 자식들의 자식까지 책임지는 것이다.


고로 제 3자가 보기에 나의 포르투갈 한 달 살기는 배부른 선택이고 고집일 것이다. 하지만 한 달 살기 같은 여행을 할 것을 진심을 다해 부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위 막노동을 해서라도 돈을 모아 여행을 떠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에게 시간은 오직 자신으로 하여금 유의미하고 스스로 답을 내리기까지 필요하다. 즉 아주 쉽게 샤넬백을 살만큼의 여유가 없더라도 이 여행은 작은 노력으로도 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굳이 포르투갈이 아니어도 된다. ‘용기’로부터 새로운 삶은 시작된다는 것을 명심하라.




매일 늦잠을 자야 하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서른다섯 살이 된 나는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접촉을 두려워하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해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가 재정립되던 시기였다.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감미로운 자연풍경을 넷플릭스 삼아 감상하고 남루한 남색 셔츠와 세탁이 절실해 보이는 빈티지 청바지를 입은 성인 남자는 소유하고 싶지 않은 갈색뿔테를 꼈고, 또래로 보이는 갈색깔 곱슬머리가 매력적인 여자는 힐끔 보더니 자리를 띄어 앉는다.


부활절이 코앞인 3월 31일. 옥탑방까지 오기까지 수백 개의 낡은 나무계단을 오르고 또 침대까지 수십 개의 삐그덕 오르간 소리를 내는 계단을 오른다. 다소 문명에서 벗어난 시작에 개나리색 티셔츠의 겨드랑이 부분은 회갈빛 음영이 졌고 금세 허기도 찾아왔다.

해가 지기 전 검정 배낭을 메고 동네마트로 향한다. 실수로 동전이라도 떨구면 데굴데굴 굴러 저멀리 지하철역까지 굴러갈 것 같다. 길모퉁이를 돌자마자 동네에서 한주름잡을 것 같은 카페와 레스토랑이 나온다. 아마 나는 이방인이라서 가지 못할 것 같다. 다시 빠른 보폭으로 움직인다. 가난한 워홀러 시절 즐겨 찼던 ‘리들’이 반갑다. 한국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들어서자마자 점원에게 고개를 숙였다. 순간 아차 싶었다. 파란색 바구니도 아닌 끌차도 아닌 애매한 장바구니를 끌고 걷는 순간 집을 떠난 것이 실감 난다. 파란 눈동자는 일제히 나를 향한다. 나도 부산 외곽지역에 살고 있고 우리동네 마트에 흑인을 보면 놀랄 것 같다. 하지만 당사자는 외로움을 덜고자 재빨리 생수부터 맥주, 와인, 샐러드, 과일, 빵을 담기 시작한다. 백수로서 늘 하던 일이다. 계산대에 직원에게 영어로 말해야 할 뿐이다. 가져온 배낭의 지퍼를 열고 하나둘 담는데 아무도 재촉하지 않는다.


마트를 오기 전과 후는 명과 암으로 표현할 수 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해 가로수 사이 불빛이 일렁이듯 춤춘다. 길가를 스치는 오토바이 소리도 마녀의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저 꿈만 아니길 바라는 찰나 1층 공용주방에 도착했다. 냉장고에 사 온 것을 정리해 넣고 콥샐러드와 라즈베리를 씻어 그릇에 담아 이윽고 방으로 올라간다. 자기주장이 센 계단을 신경 쓰다 그만 라즈베리를 떨구면서 씻어만 둔 와인잔이 생각났다. 아마 잠이 들었을 것이다. 병나발로 알딸딸한 정신에도 새벽녘 흔들거리는 침대로 인해 눈을 떴다. 예기치 못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