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예기치 못한 일은 일어난다. 태어나 옥탑방은 처음인데, 일톤 트럭이 지날 때마다 방 전체가 흔들릴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시도 때도 없이 침대가 춤을 춘다. 헤드뱅잉 하듯 강제 기상해 이른 일과를 시작하게 되었다.
새벽부터 부엌으로 내려간다. 몸이 천근만근인데 배는 또 고파서 증조 할머니급 계단과 한몸이 되어 삐그덕 삐그덕 소리를 낸다. 한숨을 뱉고 문을 열고 또다른 문을 연다. 냉장고 두 번째 칸에 둔 음식들은 그대로다. 나머지 음식들은 각 층 사람들이 저장해둔 것이다. 어제 안면을 튼 영국인 아저씨는 아래칸을 쓰는데 쪼그라든 서양대파가 눈에 들어온다. 그의 주름같이 시들시들한 리크는 한국대파와 달리 크고 스테인리스급 질긴데 변형의 정도를 보아 상당한 시간동안 보관했을 거라 짐작해본다.
싱크대는 나의 부지런함을 증명하듯 건조함을 유지하고 있다. 빵과 샐러드, 그리고 블루베리를 씻어 커피를 마실까 고민한다. 그런 고민 하나하나가 어렵지 않아 한결 정신이 가볍다. 구름처럼 옅은 미소가 두둥실하고 띠더니 가벼운 몸으로 계단을 오른다.
포르투에서 나의 하루는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다. 비행 일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새벽기상을 하지 않나, 가벼운 아침을 먹지 않나, 외출이 기다려지지 않나. 닭 울음소리를 들은 것도 아니고, 전날 끼니를 굶은 것도 아니며, 콧바람을 쐬지 않은 것도 아닌데. 첫 스케치는 이상스럽게도 현대인의 시간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 같다.
‘십 년이 흐른 지금 누가 가장 행복할까? 누가 가장 나다울까? 누가 가장 자유로울까?’ 하는 질문이 불현듯 뇌리를 스친다.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은 초등학교 동창. 연락해도 답장이 없는 절친. 승진에 목매는 친구. 안정된 직장을 위해 열공하는 언니. 자식을 위해 투잡을 뛰는 오빠 등 나를 둘러싼 인맥은 자연히 나와는 멀어져 갔다. 친구들은 인서울부터 유명한 국립대까지 훨씬 등급 높은 학교를 졸업했고 나는 취미에도 없는 역사학과를 간 이후로 각자의 인생극장에서 우리는 온데간데없었다.
나는 숱한 공허함에 혼자 놀기를 밥 먹듯 했고 공부는 낙제를 면할 만큼만 했다. 공부와 담을 쌓았지만 스무 살 때부터 꾸준히 적금과 펀드도 안정추구형으로 투자를 지속했다. 어떤 이는 한창 투자해 억만금을 벌어도, 악착같이 번 돈을 지키기 위해 ‘원금보장’은 필수였고 선택이었다. 귀국 후 근로소득으로 월 백만 원씩 적금을 들고 모인 돈을 지수연동예금에도 부으며 멀쩡한 장독대에 물 붓기는 순조로웠고 조금씩 크기를 키워가며 여러 장독대에 물을 저장할 수 있었다.
이후 결혼과 내 집 마련을 위해 절반 이상을 탕진하고 수중에는 퇴직금을 쓰고 남은 돈뿐이었고, 그 돈으로 포르투갈 한 달 살기를 떠난 것이었다.
퇴사 후 코로나 때 우량주를 사서 두 배 이상 수익을 거둔 친구들과 티비만 틀면 언론에서 떠들어대는 코스피 장중 사상 삼천피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 나의 투자성향은 변화를 거듭해갔다.
“어머! 연일 빨간불이야!“
한국에서 눈 뜨고 가장 먼저 하는 일이던 경제뉴스를 보고 미래산업에 투자를 한 것이 변화의 시작을 끌었다. 포르투갈 땅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나의 투자 성과는 믿을 수 없게 고공행진이었다. 첫 주식투자는 날이 갈수록 치솟았다. 두 배로 시작해 다섯 배까지 뛰고부터 생각이 달라졌다. 이십 대부터 시작해 밥과 커피처럼 경제공부는 당연했기에 자산관리 포트폴리오가 눈에 보일 성과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십 년을 묵히고자 매수한 주식으로 포르투갈 한 달 살기는 어깨를 피고 당당히 할 수 있을뿐더러 샤넬백들을 살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포르투에서 보내는 일상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고 많게는 하루 십만 원씩 써가며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사실 투자금은 중소기업이 지은 구축아파트를 매수한 시점으로부터 나왔으며 내 자식에게 물려줄 세상이 없다고 생각한 시점부터 만들어졌다. 손에 꼽는 친한 친구들은 학군과 시세를 따져가며 일군 아파트를 양가 부모에게 손을 벌려 힘겹게 사드렸다. 나는 온전히 내 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여행과 동시에 공격형 투자를 시작한 것이 차별점이다. 그래서 포르투갈 한 달 살기는 변화이고 도전이 깃든 경험이자, 자가 구축한 인생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할지 실험해 보는 것이었다.
또 하나 나는 크리에이터를 포함한 디지털 노마드라는 직업에 관심을 갖고부터 매일 글을 썼다. 제멋대로의 글일지라도 블로그를 찾는 사람은 점진적으로 늘어갔고 협찬과 광고를 통해 부수입을 얻기 시작했다. 블로그가 돈이 되고부터 대가를 바라고 쓰는 일이 잦아졌지만, 하루도 빼놓지 않고 타자기를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