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 옥상 헬리패드 중앙의 커다란 H 표식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헬리콥터 접근 중! 거점 클리어!”
해군병원 보안요원이 무전으로 외쳤다. 국정원 마크가 새겨진 헬기가 착륙하자, 간호장교로 위장한 루시가 먼저 뛰어내렸다. 엔진음이 공기를 가르고, 바람이 루시의 머리칼을 휘날렸다.
“심박 약화, 산소 포화도 82.”
의무관이 짧게 말하자, 김진은 거칠게 마스크를 벗으며 로빈의 들것을 잡고 외쳤다.
“시간이 없어. 지금 바로 이송해야 합니다.”
“심전도 모듈 연결! SRVL까지 60분 안에 가야 됩니다!”
의무병 두 명이 들것을 고정하고, 김진은 옆 좌석에서 인공호흡기 모듈을 직접 조정했다. 헬기 문이 다시 닫히고, 조종사가 “이륙 준비 완료!”를 외쳤다. 프로펠러의 소음이 하늘을 찢을 듯 커졌다. 루시는 들것 위에 누운 로빈의 손을 꽉 잡았다. 손끝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로빈, 제발... 버텨줘. 아직... 할 말이 많단 말이야. 나 때문에ㅜㅜ”
헬기의 회전날개가 천둥처럼 울리며 도심의 불빛이 흔들렸다. 루시는 창문 밖 어둠을 응시했다. 남해의 바다는 까맣게 숨죽이고 있었고, 그 아래 어딘가에서 은빛 구체의 기억이 여전히 미세한 전파처럼 퍼지고 있었다.
SRVL 지하 벙커 내부는 차가운 백색광으로 가득했다.
‘HDBB-01 정신 디지털화 장치’
한눈에 보기에도 조잡했다. 구식 서버랙에 붙어 있는 그래픽카드들이 RGB 불빛을 깜빡이고 있었고, 다이빙 헬멧처럼 생긴 은색의 구동용 전극 헬멧은 원래 ‘수험생 뇌파 학습기’의 프로토타입을 급하게 개조한 것이었다. 헬멧과 본체 사이에는 굵은 냉각관이 여러 갈래로 뻗어 있었는데, 그 끝에는 시원찮은 중고 에어컨 실외기가 달려 있었다. 벽에는 한때 채굴장에 걸려 있던 낡은 비트코인 차트 모니터가 켜져 있었고, 초록색 숫자가 의미 없는 파동을 그리며 깜빡였다.
로빈의 머리에 헬멧을 씌웠다. 차갑고 미끈한 금속의 표면이 루시의 손바닥 표피를 스쳤다. 그 감촉이 현실을 환기시켰다. 그녀는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눈가에선 미세한 수분이 맺혔지만 닦지 않았다. 입술이 말라 있었다. 손가락 끝이 떨렸다. 누워있는 로빈의 눈은 먼 곳을, 초점 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루시는 로빈의 맞은편에 서서 기계를 점검하는 김진을 바라보며 숨을 죽였다. 그의 눈은 굳게 닫힌 결심과, 그 아래로 서늘하게 흐르는 불안으로 반짝였다.
“시작합니다”
김진의 목소리엔 기묘한 들뜸도 함께 섞여 있었다. 그는 손으로 마지막 케이블 몇 가닥을 정리했다.
“전원 테스트… 오케이.”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
“괜찮을까”
그는 작은 목소리로 자신에게 물었다.
루시가 다가와 로빈의 손등을 잡았다. 손은 차가웠다.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체온은 로빈을 현실로 끌어왔다. 둘의 시선이 잠깐 마주치는 듯했다. 말은 나오지 않았다.
“로빈.”
루시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눈망울이 흔들렸다. 뭔가 떠오르려는 말이 혀끝에서 맴돌았다. 루시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입술이 떨렸다. 로빈은 말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았고, 그 작은 느낌이 로빈의 가슴속에 남은 말을 대신하는 듯했다.
"미안해요 로빈, 그때 당신을 선택해서..."
"고마워요 루시, 당신이 옆에 있어줘서..."
둘 사이에는 말보다 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무거워진 분위기에 김진이 가볍게(?) 화제를 던졌다.
“이 시스템으로 영원한 삶, '길가메시'를 꿈꾸는 재력가들에게 희망을 주고 연구비를 조금 챙기려 했는데”
“사실 처음에는 이게 그냥 뇌파 분석 수준에 불과했어요. 로빈 대위님의 도움을 받기 전까지는..."
로빈은 ISS에서 포집된 카우스의 캡슐에서, 공식 보고서는 모두 삭제됐지만, 핵심 데이터를 몸속에 저장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의식 디지털화 프로토콜’ 유기체의 정신을 고스란히 추출하고, 손실 없이 저장하는 외계 알고리즘이었다. 김진은 그 데이터를 복호화하고, 자신의 엉성한 장비에 억지로 이식하는 데 성공했다.
<H-01의 내부>
- 신경 매핑 보드: 버려진 GPU 보드 위에 NASA 데이터에 나온 ‘양자 상관 신호 패턴’을 흉내 내는 코드를 새겨 넣었다. 신경세포의 패턴을 단순한 전기 신호가 아니라, ‘확률 분포 맵’으로 변환하는 방식이었다.
- 기억 압축 알고리즘: Kaos 프로토콜은 기억의 중복을 ‘벡터 겹침’으로 처리했다. 수백 번 겪은 훈련 비행은 한 줄기 파형으로 요약되었으나, 루시의 단 한 번의 사랑의 눈빛은 결코 압축이 힘들었다.
- 오류 보정 모듈: 인간의 망설임, 후회, 불완전한 사고까지도 ‘잡음’으로 버리지 않고 오히려 메타데이터로 저장했다. AI라면 쓸모없다 여길 잡음이, 인간다움을 유지하는 핵심 값이 된다.
“이제 시작하면, 정신은 디지털로 이전됩니다.”
김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숨은 멎을 거고, 몸은 기능을 잃습니다. 하지만 정신은... 여기에 남게 될 겁니다. 살아남는 건 데이터죠.”
김진이 스위치를 당겼다. 낡은 장치가 불을 뿜으며 깨어났다. 모니터에 파형이 나타났다. 낡은 전극이 그의 머리를 감싸자, 화면 위로 파란 뇌파가 춤을 추었다. 곡선은 단순한 파형이 아니라, 기억의 좌표로 변환되며 허공에 그려졌다. 뇌파가 신호로 변환되고, 신호가 압축되어 코드로 바뀌고, 코드가 다시 기계어로 변해 서버 속을 타고 흘렀다.
로빈의 손이 힘없이 미끄러지는 듯했다. 육체는 점점 무거워졌다. 인공호흡기에 연결된 그의 숨은 얇아졌고,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모니터는 최종 패킷을 보냈다.
전극에서 감지된 미세한 전위차가 0과 1의 연속으로 변환되어 서버로 흘러 들어갔다. 그 신호들은 분절되고, 재조합되고, 의미망을 형성하고, 결국 ‘로빈’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의 맵으로 수렴되었다. 시간은 확장되었다. 로빈의 기억은 끝없이 펼쳐졌고, 그 가운데 작은 장면들이 튀어나와 반짝였다
"플라타너스 아래에서의 낭만, 전투기 조종석의 차가운 금속 그리고 루시의 따뜻한 손..."
유기체로써 로빈의 눈이 마지막으로 번쩍 떠졌다. 그러나 곧 그의 몸은 미세하게 경련을 일으키며 서서히 힘을 잃어갔다. 심장이 멎었고, 호흡이 끊겼다. 루시는 그 떨림을 보며 눈을 감았다. 동시에 서버랙의 내부는 빛으로 가득 차며, 새로운 생명이 자라나고 있었다.
모니터 건너편에서 로빈의 정신이 이식될 T-9 모델의 골격이 미세하게 떨기 시작했다. 금속 관절 사이로 전류가 흐르며, 냉각팬이 한 차례 더 돌았다. 그리고, 아주 낮고 기계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부팅 완료. 인식 주체: KIM, ROBIN.”
모니터 위에 글자가 떴다.
[Boot Complete: Consciousness Transfer , Subject: ROBIN, Status: Active]
T-9의 두 눈에 불이 켜졌다. 철의 육체가 고개를 들어 천천히 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 낯익으면서도 기계적인 목소리가 울렸다.
“... 루시?”
그 목소리. 확실히 로빈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이 아닌 새로운 존재였다. 인간의 정신을 디지털화하고 로봇과 융합하는, 합성진화 알고리즘을 적용한 Transhuman (트랜스휴먼) 탄생의 순간이다.
루시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속삭였다.
“돌아와 줘서 고마워요.”
로빈의 정신이 깨어났다. 그러나 그 깨어남은 이전의 그것과는 달랐다. 그의 ‘의식’은 이제 수많은 데이터 스트림에 동시 접속되어 있었고, 한 번에 수십 개의 정보 레이어를 읽을 수 있었다. 도시의 전력망, 국방망의 패킷 흐름, 루시의 미세한 심장 박동까지도 한꺼번에 읽혀 들어왔다.
그들은 그렇게, 새로 태어난 존재와 남겨진 이들이 만들어 내는 어색한 첫 호흡을 나눴다.
“내가... 살아 있군요. 아니, 살아 있는 건가요?”
“심장이 멈췄는데... 내가 아직 생각하고 있다는 게...”
“늘 길을 잃었는데... 지금은 길이 보이는군요.”
로빈의 여전한 많은 말에 그녀는 얼굴을 돌렸다.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건물 안은 잠시 고요했다. 그러나 트랜스휴먼 로빈의 가슴속에서는, 방금 태어난 새로운 존재의 심장이 아니, 전력 코어가 규칙적으로 뛰고 있었다. 김진은 조용히 화면을 바라보다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래, 이제 시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