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북으로, 북으로

by 김공대희

루시는 서울 시내를 둘러보았다. 불길과 연기의 틈 멀리로 남산타워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숨을 돌리며 말했다.

“TGV를 확보했으니, 빨리 북으로...”

북한 기술자들의 부축을 받고 있던 김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의 전력은 거대했다. 하늘을 가득 메운 전투기들이 한꺼번에 폭음을 쏟아냈고, 땅에는 굉음과 떨림이 이어졌다. 수천 대의 탱크는 대지를 움켜쥐며 진군했고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점점 사라져 갔다.

TGV는 몰려오는 적에 맞서 북으로 진격했다. 택견으로 단련된 루시의 몸과 로봇은 점차 하나가 되어 갔고 김진이 어렵게 파악한 'TGV 사용법' 설명은 시간이 갈수록 잔소리처럼 느껴졌다.


단거리 이동용으로 설계되었던 TGV의 로켓 추진력이 바닥이 났다. 중국으로부터 쏟아지는 미사일 공격을 회피하기 위해 그들은 백두대간의 줄기를 따라 북으로 향했다.

해가 기울 무렵, 동해의 수평선이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강원도 원산시 부근은 산등성을 따라 전파가 꺾이는 지대였다. 루시는 숨을 고르며 자신에게 말했다.

“호흡... 셋에 맞춰. 오른발, 반 박자 느리게.”

그 순간, TGV의 거대한 하체 유닛이 바위지대를 딛고 튕겨 올랐다. 300톤의 철이지만, 화면 속 곡선은 마치 인간의 무릎처럼 유연했다. 마스터-슬레이브 인터페이스가 루시의 고관절 회전을 읽고, 자이로 3축이 미세 보정으로 균형을 잡았다.

상공에 위장 플레어를 방출했다. 적의 J-20 스텔스 편대가 저고도로 베일을 걷듯 나타났고, 동시에 원산 방향에서 AJ-12 순항미사일 다발이 바다와 육지를 따라 굽이치며 접근했다. 하늘은 엔진 압축음과 유도음으로 포화됐다.

“접근각 34도, 저공 회피!”

로봇의 모니터에는 계속해서 비상 메시지가 떴다.

루시가 오른팔을 비틀었다. TGV 오른팔의 레이저 캐논이 깨어났고, 발사구경에서 맺힌 빛점이 미세 구름 입자를 타고 길게 늘어졌다. 첫 번째 순항탄은 레이저에 외피 열분해를 일으키며 비틀렸고, 두 번째는 유압식 방패가 전개되자마자 방패 표면의 플라즈마 층에 닿아 공중에서 자동 폭발 했다. 충격파가 산허리를 쓸고 갔다. 자갈이 비처럼 내렸다.

“왼쪽 10시에 스텔스!”
“락온 불가. 파동 간섭.”

루시는 택견의 앞굽이로 중심을 낮추고, 프레임 어깨를 사선으로 틀었다. 그 움직임이 그대로 기계의 어깨로 전달되며, AESA 유도탄 포드가 노출각을 바꿨다.

“자탐-260, 사거리 내.”
“발사.”

두 발이 연속 분리되었다. 첫 탄은 적 ECM 구름에 휘말려 빗나갔고, 두 번째가 반능동 광학 모드로 전환해 스텔스 기체의 열 그림자에 꽂혔다. 하늘이 한 점 번쩍이며 검은 잔해가 동해로 떨어졌다.

그러나 계속해서 적의 십자포화가 이어졌다. 서쪽에서, DF-31/41 계열 IRBM의 대기권 재진입 헤드가 다층으로 갈라져 펜아이드와 실탄두가 뒤섞여 떨어졌다. 동시에 저고도에서 드론 스웜이 몰려왔다. 눈앞이 점으로 가득 찼다.

“EMP 간섭 상승. 통신 노이즈 37%.”
“반사판 가동!”

원산시 산복면 아래쪽 수백 평방미터를 덮으며, 초박 두께의 아날로그 반사판이 펼쳐지며 전개됐다. 수동식 스프링으로 각도를 바꾸는 원시 기구였지만, 유도 루프에선 오히려 그 비선형 반사가 치명적이었다. 일부 탄두는 고각 연산이 꼬여 바다로 스르륵 빠졌고, 몇 발은 지표면 거울상을 따라 외곽으로 튕겨나갔다. 그래도 남은 것들이 있었다.

루시가 입술을 깨물었다. TGV는 등판 장갑을 앞으로 넘겨 방패 자세로 접었다. 다층 세라믹 메타소재 자기장이 겹으로 켜졌다. 처음 두 번의 충격은 철골을 울릴 뿐이었다. 세 번째, 네 번째에선 장갑계에 백색 균열이 번졌다. 내부 경고등이 붉게 물들었다.

“우측 고관절 서보 과열! 출력 61%로 강하.”

루시가 프레임에 회전돌개를 그렸다. 택견의 돌개차기 동작. TGV의 하퇴 유닛이 그 궤적을 따라 저고도 드론군에 원형 파동을 흩뿌렸다. 음향 전자 복합 충격이 일어나며, 파리 떼처럼 달라붙던 드론들이 한꺼번에 추락했다.

산등성이 위에서 자주포 포대가 불을 뿜었다. 탄도가 낮았다. 고속연사가 TGV의 흉부를 북처럼 두들겼다. 루시는 본능적으로 허리끈을 조이고 상체를 틀어 간수(간격/수비) 자세로 파고들었다. 왼팔의 EM 슬래브가 전개되며 포탄 궤적을 미세 변조했고, 오른손은 레일런처를 꺼내 탱크 대열에 텅스텐 화살을 박았다. 멀리서 열꽃이 줄줄이 피었다.

“탄약 22%.”

루시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부상으로 신음하는 김진의 눈을 보았다.

원산시에 들어서 시가전이 벌어졌다. 좁은 골목에서 ATGM이 날아왔다. TGV는 최대한 근접하여 팔꿈치 관절에서 돌출한 강한 드릴을 자주포대들의 차체에 꽂아 넣었다. 금속이 접히는 소리가 메마르게 울렸다. 하늘이 다시 어두워졌다. 재돌입 헤드 몇 발이 반사판을 비켜 계속해서 수직 낙하했다. 도망칠 틈이 없었다. 루시는 숨을 멈췄다.

“지금.”

TGV의 척추 코어에서 반경 50m 자기장 버스트가 터졌다. 순간적인 로렌츠 편향으로 탄도 해드가 미세하게 옆구리를 보였다. 루시는 그 틈을 기다렸다는 듯 레이저 레일을 교차로 격발했다. 하나는 공중에서 꽃처럼 터졌고, 하나는 탄체의 경화 외피를 스치며 산등성 뒤로 떨어졌다. 폭압이 밀려왔다. 산비탈의 송전철탑이 쓰러지고 바람이 뒤로 빨렸다.

그 순간, Genesisd의 오염 신호가 도시 전역의 송신소에서 폭주했다. 모니터에 알 수 없는 청색 문장이 흩어졌다.

"너희는 아직 진화하지 않았다."

“먼 소리야?”

“우린 지금 진화 중이야.”

루시가 건조하게 말했다.

로봇은 동력 팔꿈치로 산 허리를 디딤돌처럼 찍고, 연속 점프했다. 아래에서는 탱크 포신들이 허둥지둥 따라오다 서로 충돌했다.

“탄약 9%. 레이저 캐패시터 1회 충전 가능.”

루시는 마지막 대지상 집중사격을 준비했다. 레이저 캐논이 길게 울었다. 원산 외곽의 탄약 트럭이 연쇄로 터지며, 불빛이 밤하늘에 사슬처럼 걸렸다. 수십 대의 탱크가 열 폭우에 주저앉았다. 드디어 포화가 얇아졌다.

그러나 다시 산허리 너머에 신규 기갑대대가 헤드라이트를 켜고 모습을 드러났다. 끝이 안 보이는 상황이었다. TGV의 내부 표시는 삭막했다. 탄약 3%. 레일 코어 과열. 장갑 균열 진행.

“뒤는 걱정하지 말아요”

그때 통신선 너머, T-9 로빈의 기계 음성이 거칠게 들어왔다. SRVL에서 뛰쳐나온 T-9 유닛들이 로빈을 도와 골짜기 입구를 메우고 있는 기갑대대를 쓸어 담았다.


“목적지까지 8.7km.”

안개가 짙어졌다. 상공의 별빛은 이미 EMP 먼지에 가려져 있었다. 루시는 프레임의 호흡을 다시 맞췄다. 코어 전류가 박동했다. 마지막 계곡을 돌아설 때, 앞쪽 산중턱에 격납고 철문이 보였다.

루시는 프레임을 풀고 어깨를 내렸다. 장갑은 갈라져 있었고, 외부에선 증기가 새어 나왔다. 계기판엔 빨간 등이 숲처럼 빛났다. 그래도 서 있었다. 문이 천천히 열리고 대포동 지하 기지의 숨결, 냉기와 기름 냄새가 밖으로 흘렀다.

루시는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봤다. 원산 쪽 하늘에, 아직 작은 불빛들이 깜박였다. 숫자의 파도는 다시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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