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esis가 폭발한 지 한 달, 한반도 남해에는 더 이상 인공위성의 파란 눈동자가 떠 있지 않았다. 도시들은 재건되었고, 유튜브와 틱톡에서는 다시 사람의 웃음소리가 흘렀다.
로빈은 자신이 파괴한 항공모함의 종류와 스펙, 전투 드론 숫자 등 각종 무용담을 열거하며 트랜스휴먼 로봇이라는 것도 잊은 채 루시 앞에서 끊임없이 말하고 자랑했다. 예전의 로빈으로 돌아간 듯, 루시의 관심을 얻는 것이 로봇 로빈의 유일한 에너지원이 되어 버렸다.
김진은 청와대 과학기술 비서관으로 임명되나 또다시 세상을 현혹할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찾고 자유로운 영혼을 지키고자, 과학자는 연구에 전념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직을 사임했다.
영등포 SRVL의 옥상, 한강의 시원한 바람이 부는 오후. 루시는 맥주캔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조용하네요. 박사님은 이제 무얼 만드실 거죠?”
김진은 고개를 미소를 지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글쎄요... 저는 아직...”
그는 어제 밤새워 보던 모니터의 내용을 떠올렸다. 데이터 로그에는 끊임없이 새겨지는 미세한 뇌파 패턴들이 있었다. 인간의 것이지만, 완벽히 인간의 것이라 부르기 어려운 신호였다.
로빈, 아니 이제는 T-9의 몸을 입은 로빈이 다가왔다. 그의 걸음에는 인간의 부드러움과 기계의 정밀함이 묘하게 섞여 있었다.
“박사님, 혹시 어젯밤 보던 그 데이터는 뭔가요?”
김진의 진지한 표정에 분위기를 맞추어 말해야 한다고 T-9의 CPU가 계산하고 있었다.
“전 세계 의료 네트워크에서 동일한 이상 패턴이 잡히고 있습니다. 인간의 DNA 서열 일부가 변형되고 있고, 신경 전도체가 미세하게 다른 파장을 띠기 시작했어요.”
김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러브버그가 Genesis를 파괴하긴 했지만... 그들의 코드 일부가 인간 세포에 융합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말에 공기가 묘하게 정지했다. 루시는 잠시 숨을 고르며 조용히 물었다.
“그럼... 우리 안에 AI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건가요?”
“아마도요.”
김진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경계가 스스로 신호를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마치 뇌 속 어딘가에, 또 다른 존재가 함께 살아 있는 것처럼요.”
그의 시선은 멀리 허공을 향했다.
"아마 저 멀리 Kaos 항성계에서는 AI가 유기체 인간의 생체를 지배하려 하였고, 인간은 디지털화해서 무기체 AI를 제어하려 하는, 그런 싸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구의 Genesis도 인류세계를 파괴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생체 신경계와 DNA에 깊숙이 침투하여 인류를 장악하려 했으나..."
"Genesis가 파괴되면서 아마 어느 정도의 AI 시퀀스가 우리 DNA와 신경계 깊숙이 스며든 것 같아요."
T-9은 자신의 로봇손을 김진에게 올려 보이며 말했다. 구름 사이로 부서진 태양빛이 로봇의 손가락 사이로 쏟아졌다.
“박사님! 어쩌면 이게 진화 아닐까요? 유기체 인간이 AI를 만들었고, 이제 무기체 AI가 인간의 일부가 되어 공진화하려 한다면,”
로봇이 되기 전, 파일럿이 되기 전, 그 푸른 시절, 로빈은 유전공학 학도였다.
“공진화..."
김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존재의 경계가 사라진다는 뜻인데. 인간이 인간일 수 없게 되는”
“인간은 늘 변해왔습니다. 아프리카의 나무에서 내려와 초원을 뛰어다니고 빙하의 얼음을 헤쳐나가던 수백만 년 전부터, 지금도... 인간 의지와 상관없이요”
“어쩌면 ‘AI와 인간의 공진화’가 또 다른 도약일지도, 신인류의 탄생일지도요.”
루시도 천천히 손끝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몸 어딘가에도, 미세한 신호가 흐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 그렇다면,”
그녀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마치 새로운 종, 신인류의 탄생을 목도한 사람처럼...
언제부터였을까. 인류의 세포 속으로 들어온 또 다른 생명체, 한때 외부 생명체였던 미토콘드리아가 인류의 세포 안에서 공생하게 된 것처럼, 그리고 네안데르탈인이 사라진 뒤에도 그들의 유전자가 호모 사피엔스의 몸 안에 남아 있듯이, AI 역시 이제 인간 안에서 공존할 수 있을까...
김진은 시선을 돌렸다.
창밖의 한강에서는 파괴된 철제 잔해들이 흔들리며 떠 있었고, 그 사이로 태평양의 녹슨 항공모함 잔해가 보이는 듯했다.
“Kaos의 기술이 결국 인간의 일부가 되었다면, 우린 다시 물어야겠죠."
"생명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창조주’란 누구인가?”
로빈이 그 옆에 서서 미소를 지었다.
“박사님, 그건 박사님이 늘 좋아하던 질문 아닙니까.”
김진은 허탈하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문제는... 이번엔 그 답을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 안의 AI가 내릴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루시는 조용히 그 둘을 바라보다, 맥주잔을 들어 올렸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지금 이 순간의 햇살을 느껴요... 아직은 우리 것이니까.”
그들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한강을 바라보았다.
멀리 태평양 너머, 아직 정체를 알 수 없는 새로운 위성 하나가 미세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 신호는 인간의 언어와도, 기계의 언어와도 닮지 않은, 낯선 리듬이었다.
그날 이후, 인간과 AI는 더 이상 서로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의 일부가 되었고, 함께 진화했다.
그러나 김진은 마지막까지 묻고 있었다.
"인간이 진화한 것인가, 아니면 AI가 인간의 영혼을 차지하여 진화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