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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쏨땀쏨땀 애슐리 Jul 03. 2021

산 미겔 때문에 당한 사기결혼

술쟁이는 남편도 酒님이 주신다

편의점 진열대에서 산 미겔 맥주를 꺼낼 때마다 늘 생각한다. '에이, 산 미겔은 330ml짜리 병에 든 게 최곤데 아쉽다. 500짜리 캔은 마시다 식어서 흥이 깨지잖아.'


산 미겔 페일 필슨은 스콜이 쏟아져 후텁지근했던 필리핀 수빅의 그 밤으로 나를 데려다준다. 거의 매 주말 밤의 기억은 이렇다. 모기에 뜯기기 딱 좋은 야외 카페테리아, 테이블 위엔 아이스 버킷에 담긴 산 미겔, 돼지 머리나 내장을 다져 짭짤하게 볶은 시시그.


청량감으로 갈증 해소제 역할을 톡톡히 하면서도, 홉향이 진해 너무 가볍지 않은 것이 산 미겔의 매력이다. 옥수수가 들어가 구수하고 달큰하게 넘어가는 끝 맛이 좋아 하면발효 맥주 중에서는 세 손가락 안에 꼽는다. 물론 맛도 맛이지만 한창 마셨던 그때의 추억 때문일 테다.




13년 전 7월, 24살의 나는 아이에서 어른으로 넘어가는 즈음에 있었다.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곧 있으면 취업 전선으로 나가야 하는데, 실력도 마음의 준비도 안돼 시간을 멈추고만 싶었다. 여러 차례 대학생 인턴 기자에 지원을 했는데, 그때마다 서류 통과 한 번 안되고 무참히 떨어지길 반복했었다.


마침 7학기 만에 처음으로 성적 장학금을 받게 된 게 운명이었을까? 우편함에 도착한 성적표를 의기양양하게 들고 집에 올라왔더니, 통 큰 우리 아빠가 그랬다. "네가 열심히 해서 이룬 성과니, 그 돈을 쓰고 싶은 데 써라." 그 돈으론 2달 동안 필리핀 어학연수를 하면 딱 맞았다.


열심히 공부하겠다며 일부러 주말에만 외출할 수 있는 스파르타형 기숙학원을 선택했다. 근데 이게 또 평일엔 술을 못 마신다고 하니, 주말에는 밤을 새워 마셔줘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들어서 말이지. 그렇게 새벽 두 세시까지 산 미겔을 마시는 내 옆에서 자기도 술을 좋아한다며 허풍을 떨던 이가 나와 같이 사는 사람이다.


7년 연애의 데이트 코스도 거의 술 좋아하는 내 위주였는데, 그가 본색을 드러내는 데는 채 1년이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어떻게 매일 술을 마셔? 해도 너무한 거 아냐?" 난 진짜 억울하다. 7년 동안 내가 매일 술 먹는 걸 몰랐느냔 말이다. 속인 게 나야, 오빠야?


결혼한 지 만 6년이 지났지만 술 말고도 우리는 다른 점이 참 많다는 걸, 30년 넘게 각자 산 남녀가 한 가정을 이뤄 사는게 쉬운 일이 아니란 걸 자주 깨닫곤 한다. 나는 놀고 먹기 좋아하는 배짱이 글쟁이고, 그는 목표를 수치로 설정하는 공대 출신 금융맨이다. '진짜 안맞는다 정말. 맘에 안들어' 할 때가 하루 이틀이 아님에도 또 '휴, 귀여우니까 봐준다.' 하고 넘어가주며 7년째 살고 있다.




난 산 미겔을 시켰는데, 수박쥬스를 먹겠다던 남편.


얼마 전 친구 J가 하는 말. "네 남편같이 사기치고 결혼한 사람이 또 있더라. 탤런트 이시영 남편이 그렇게 결혼 전에 새벽 4시에 같이 뛰어주더니, 결혼하고는 한 번도 안 뛰더래."


그래도 그 모든 게 거짓은 아녔을 거라 믿고 싶다. 여행지나 맥줏집에 산 미겔이 있으면 나만큼이나 반가워하는 사람이니까. 그는 딱 한 병이 좋고, 나는 버킷 째 시키는 게 좋다는 점이 다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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