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끼 상어와 함께 하는 스노클링, 럭셔리한 요트가 즐비하게 정박해 있는 텔라가 하버 파크, 스릴만점 케이블카, 독수리에게 먹이를 주는 이글피딩...랑카위를 대표하는 여행 스폿이 많지만, 기억에 가장 강렬하게 남은 장면은 판타이 체낭(Pantai Cenang)에서 노을멍 때리며 한 잔 하던 바로 그 순간이다.
직항도 없는 말레이시아 랑카위를 택한 건 술값이 싸다고 해서였다. 20대의 마지막 여름이었다. 험난한 취업전선을 뚫고 우리 모두는 돈을 벌고 있었다. 그해, 그 이듬해 결혼을 앞둔 친구가 있었다. '이젠 진짜 어른이구나, 하나 둘씩 결혼을 하면 친구들과 해외여행 가긴 힘들겠지 하며' 우리는 함께 떠날 여행지를 고민했다.
새끼 상어와의 스노클링, '파야 섬 코럴투어'. 에메랄드빛 바다에 형형색색 산호초와 열대어들이 발에 채이게 많고, 성인 팔뚝 만한 새끼상어들이 먹이를 얻기 위해 달려든다.
너무 멀지 않으면서 퇴폐·유흥 분위기는 없는 휴양지일 것, 하지만 물가가 과하게 비싸지 않아서 소비하는데 제약은 없을 것, 모두가 가보지 않은 나라. 쉬울 것 같지만 은근히 어려운 조건이었다. 거리를 생각해 아시아로 좁혀졌고, 태국을 비롯한 인도차이나 반도의 나라들과 필리핀은 이미 가본 곳들이라 제외됐다. 말레이시아가 무난해 보였는데 문제는 이슬람 국가라 술값이 비싸단다. 방법이 없을까 이리 저리 검색해보다가 '랑카위'라는 섬 전체가 면세구역이라 주세도 없어 '여기다' 싶었다.
랑카위는 태국 국경이 머지않은 말레이시아 서북단에 위치해 있다. 배를 타고 1시간30분만 가면 태국 최남단의 파라다이스, 꼬리뻬에 닿기에 두 곳을 묶어 여행하는 이들도 많다. 백여개의 섬으로 이뤄진 군도로, 독수리를 뜻하는 '헬랑(Helang)'과 적갈색을 뜻하는 '카위(Kawi)'가 합쳐져 이름이 됐다. 독수리가 많기로 유명한 섬이라 다운타운 역할을 하는 쿠아타운에는 거대한 독수리상이 우뚝 서 있다. 독수리에게 먹이를 주는 이글피딩 체험도 유명하다.
이슬람 국가를 여행해 본 사람이라면 술값이 생각보다 비싸 놀라거나, 술을 구하고 싶은데 못 구해 당황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대도시는 그나마 비싼 값을 지불하더라도 알콜 라이프를 즐길 만한 여건이 되지만 소도시만 해도 술을 아예 안파는 식당이 많고, 물자 수급이 어려운 섬에서는 섬 전체를 통틀어 술파는 곳이 손에 꼽는다. 그래서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 말레이시아 쁘렌띠안을 여행할 때 애를 많이 먹었다.
그런데 랑카위는 섬 전체가 면세다. 그렇다고 여행 책자에서 표현한 것처럼 '쇼핑의 천국'이라고 하기엔 너무 거창하고 먹고 마시기에 충분히 좋은 여행지였다.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도 맥주를 주문할 수 있었고, 해변 모래사장에 철푸덕 주저않아 칵테일을 즐길 수 있는 바(Bar)가 즐비했다. 말레이 전통 음식부터 중식, 인도식, 서양식 음식이 마음껏 펼쳐진 식도락 여행지로 기억에 남는다.
말레이시아에서 먹은 갖가지 음식들.
나에게 스물아홉 랑카위 여행은 '학생의 여행'에서 '어른의 여행'으로 넘어가는 중간지대 같은 것이었다. 매달 꼬박꼬박 월급이 들어왔고, 주어진 시간은 두 달의 방학이 아닌 단 일주일의 여름휴가였다. 그 동안 우리가 함께 한 여행의 잠자리는 대성리나 강촌의 엠티촌, 대천해수욕장 앞 허름한 단체펜션이었는데, 랑카위에서 처음으로 5성급 리조트에서 묵는 호사를 누렸다. 펠랑기 리조트(Pelangi Resort)는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럭셔리하지는 않았지만, 동남아 전통 가옥 모습의 통나무 객실이 자연친화적이었고 전용 비치에 판타이 체낭의 노을을 즐길 만한 선 베드가 충분히 비치돼 있었다. 다른 고급 리조트들이 허허벌판 아무것도 없는 곳에 동떨어져 있는 것과는 달리 번화가와도 가까워서 현지 음식을 즐기기에도 적합했다.
상당수의 인연은 우연에서 비롯된다. 300명이 넘는 인문학부 신입생 중 우리 여섯을 묶어준 건 그 무엇도 아닌 성과 이름의 '가나다 순'이었다. 전공 선택의 기회 제공이라는 도입 취지와는 달리 전공교육약화, 학과소속감 결여 등의 부작용을 남기고 이제는 대다수의 학교에서 사라진 '학부제'가 존재했던 시절 우리 여섯은 입학했다. 어느 과로 갈지도 모를 신입생을 그냥 그렇게 방치하기가 난감하니 학교 당국은 신입생에게 소속감을 심어주기 위해 '반'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40여명씩 나눠 8개 학과 밑에 배치했다. 이씨, 임씨, 장씨들이 모인 설악반에서 스물의 우리는 만났다.
장맛비가 대차게 내리는데도 대천해수욕장에서 실컷 물놀이를 하고나서 물기가 뚝뚝 흐르는 젖은 머리를 말리며 우리는 '내 이름은 김삼순'을 봤다. 실연을 당한 삼순(김선아)이 단골 고깃집에서 쓴 충청도 소주를 찾을 때 우리가 사온 술이 충청도 소주인지 경기도 소주인지를 들여다봤고, 돌아가신 아빠의 환영을 보며 "심장이...심장이 딱딱해 졌으면 좋겠어 아부지" 할 때 아직 실연이 뭔지 잘 몰랐던 스물의 우리도 삼순의 눈물에 공감했다.
첫 만남은 우연이었지만 십수년의 인연을 이어온 건 또 다른 얘기다. 각자 다른 전공을 선택했지만 같은 교양수업을 듣자며 시간표를 같이 짰고, 공강 시간에 학교 앞 카페 벨리니에서 죽치고 수다를 떨었고, 일주일에 한 번씩은 밤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졸업하고 직장인이 되고 나선 퇴근을 먼저 하는 사람이 이태원으로 달려가 자리를 맡아놓곤 했다. 젠트리피케이션이 발생하기 전 이태원에서는 미끼상품으로 저렴한 가격에 치킨 윙을 내놓고 술을 팔던 '윙데이', '윙나잇' 행사를 하는 펍이 많았다. 1개에 300원 짜리 치킨 윙 수십 개를 시켜놓고 "사회 나와보니까 우리처럼 술을 많이 마시는 그룹은 없더라. 그래서 우리가 친군가봐"하고 깔깔대며 생맥주를 들이부었다.
당시 내가 인식한 랑카위 여행은 '이제 철없던 시절처럼 마냥 하하호호 놀 수 없으면 어떡하지', '결혼을 하고 가정이 생기면 지금의 현재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가 될 거야', '그러기 전을 즐기고 추억해야겠다' 하는 위기의식마저 감돈 여행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여행 마지막 이틀 펠랑기 리조트에서 섹스앤더시티의 캐리·사만다·샬롯·미란다처럼 비치 바에서 '으른 여자'의 여행을 즐겨보리라 한 것이다. 그 곳이 우리에겐 랑카위였지만 그 누구에겐 푸켓일 수도, 다낭일 수도, 세부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비치 바에서 마시는 술이 비싸 손을 호달달 떨면서 한 잔 씩만 시켜 분위기만 내고 리조트를 빠져나왔고, 그 전의 수 일은 여행지를 정한 목적에 충실하게 컨테이너 숙소에서 묵으며 저렴한 리조트 밖의 물가를 충분히 즐겼다. 숙소 바로 앞 이태리 뺨치게 피자를 만드는 '레드토마토'를 참새가 방앗간 드나들듯 했고, 관광지 사진보다 비치에서 술 먹은 사진이 더 많을 정도로 해변 술집을 들락거렸다. 아무렴 어떠랴. 사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우리는 비싸면 비싼 대로 마셨을 것이고, 구하기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한 번에 왕창 사서 이고지고 와 호텔 방에서라도 마셨을 것을...
펠랑기 리조트는 동남아 전통 가옥 모습의 통나무 객실이 자연친화적이었고 전용 비치에 판타이 체낭의 노을을 즐길 만한 선 베드가 충분히 비치돼 있었다.
세계관이 바뀌는 인생의 이벤트는 결혼이 아니라 임신·출산·육아였기에 다행히 그 뒤로도 한참을 함께 붙어 다녔다. 시간이 되면 되는 사람끼리, 안되면 어쩔 수 없고. 다섯이 전주를, 넷이 상하이를, 셋이 발리를, 둘이 뉴욕을, 여섯이 타이베이를, 다섯이 방콕을, 둘이 양양을...타이완 여행을 갈 때는 대다수가 직장이 있고, 절반은 남편이 있어도, 한 명은 저 멀리 다른 대륙에 사는데도 여행지에서 합류해 완전체를 이루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곗돈을 모으고 있다. 다음 목표는 우리가 마흔이 되는 2024년 프랑스 와이너리 여행이다. 스물에 만나 인생의 딱 절반을 함께 한 친구들끼리 떠나는 알콜로드를 계획한다. 마당이나 테라스가 있는 집 한 채를 통째로 빌려야지. 저녁에 마실 술을 양조장에서 넉넉히 사고, 동네 시장에서 신선한 식재료를 장 봐다가 상을 차려 ”우리가 벌써 불혹이 됐구나, 인생의 절반을 함께 한 사이구나“ 하며 중년으로 들어서는 세리머니를 성대하게 치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