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쏨땀쏨땀 애슐리 Oct 24. 2021

음주에도 자격증이 필요해?

와인자격증 취득기

코로나19 이전 나의 마지막 해외여행은 이탈리아였다. 술을 즐기고 와인을 좋아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지만 막상 와인의 고장에 술을 마시겠다는 목적으로 왔는데 어떤 와인을 골라야 잘 골랐다고 소문이 날까 고민이 됐다. 지식은 일천했고 내 눈 앞에 놓인 와인 리스트는 너무 방대했다. 와인 맛은 좋았지만 말과 글로 설명할 방법이 없어서 말이 제대로 안 트인 아이처럼 옹알이를 해대는 느낌이었다. 십 년 넘게 술 마시러 여행을 다니다 팬데믹에 여행을 가지 못하게 되자 내가 선택한 게 와인 배우기였다.


'지대넓얕(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 사람으로 태어나면 나다. 타인과 어떤 주제에 대해 대화를 할 때 "와, 넌 어떻게 그런걸 다 알아", "모르는거 너한테 물어보면 다 나온다"라는 말을 자주 듣곤 했다. 하지만 딱히 업무에 도움이 되거나 돈으로 연결되지는 않는 지식이어서 술자리 안주로 쓰이면 좋을 잡지식들일 뿐이다. 이런 성향은 취미를 즐기는 방식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여러 방면에 관심은 많아서 여기 저기 촉수를 뻗어놓고 이거 조금 저거 조금 건드려 시도해 보다가 장비빨을 잔뜩 세운 뒤 시들해져 버리고 마는 심지가 약한 인간상.


취미를 전문가의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유행이란다. 나도 무언가에 있어서는 깔짝대다 끝낼 게 아니라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고 싶다. 그렇다면 내가 질리지 않고 끊임없이 관심을 쏟을 수 있는 활동이 뭐가 있을까.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술이다.


술도 취미냐고 한심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어차피 술에 대한 예찬론을 잔뜩 늘어놓는 내 글을 읽지 않을 것이기에 신경을 끄도록 하자. 그렇다면 음주를 위해 돈과 시간을 들여 공부하고 자격증을 따는 게 과연 유의미한 활동일까? 그 돈과 노력으로 술을 더 사마셔서 경험치를 늘리면 되는 게 아닐까? 그러한 고민들을 거친 후 나는 WSET(Wine& Spirit Education Trust)취득 과정에 등록했다. 일종의 국제공인 소믈리에 교육 프로그램이다.

스파클링과 주정강화와인 수업 때 시음했던 와인들. 마지막 보졸레누보는 수강생 중 한 분이 가져오신 것.




"WSET는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호주, 뉴질랜드, 중국, 홍콩, 일본 등 전세계 70여개 주요 국가에서 권위와 공신력을 인정받고 있는 국제 와인 전문 교육 및 전문가 인증기관입니다. 전 세계 어디서나 자격증 소지자의 와인 수준을 나타내는 기준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며, 와인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대체불가한 필수자격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강의를 들은 교육기관에서 WSET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단순한 이론교육 뿐 아니라 테이스팅 훈련도 병행하기에 와인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무엇보다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쯩'을 딸 수 있다는 점은 성취감과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전에도 취미과정으로 와인수업을 들은적이 있어 레벨1을 건너뛰고 중급과정인 레벨2를 등록했는데, 기본적으로 와인에 대한 애정이 크고 여러 종류를 두루 마셔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레벨2부터 시작해도 어려움이 없을 것 같다.


레벨2의 시험은 한국식 입시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익숙한 사지선다의 객관식 문항 50문제다. 패스의 커트라인이 55%기 때문에 절반 정도만 맞춰도 자격증은 얻을 수 있지만 70점 이상 따 'PASS WITH MERIT'을 받느냐 86점 이상으로 'PASS WITH DISTINCTION'을 받느냐의 문제다. 레벨2는 취미반 정도의 난이도이기 때문에 수업 직후 틈틈이 복습을 하고, 시험 직전 일주일 정도 집중적으로 공부를 했더니 PASS WITH DISTINCTION으로 통과해 최우수 합격자에게만 주어지는 영광의 배지를 받을 수 있었다.


레벨3 강의를 앞두고 있는데, 이 과정은 레벨2처럼 낭만적으로 접근했다가는 큰 코 다친다는 얘기를 들어 잔뜩 긴장하고 있다. 레벨3까지만 국내에서 취득할 수 있고, 최종 등급인 디플로마 과정은 영국 본원이나 홍콩에서 딸 수 있는데, 한국인 중에는 디플로마를 취득한 이가 손가락에 발가락 정도만 동원해 꼽을 정도라고 한다.


최우수 등급으로 패스하면 저 작은 배지가 증서와 함께 온다. 중급 시험이니 어렵지도 않지만 다 자기만족.


레벨2는 약 90만원, 레벨3는 약 180만원 정도의 비용이 필요한지라 결코 만만히 볼 금액은 아니다. 게다가 각자 생업이 있는데 퇴근 후의 시간을 빼 수업을 듣고 시험 공부를 하는 것도 에너지를 요하는 일이다. 그런데도 와인 업계에 있지 않은 단순한 애호가가 굳이 돈과 시간을 들여 WSET 자격증을 딸 필요가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예스'다. 개인적으로 와인을 많이 마셔봤더라도 해당 와인의 특징을 숙지하고 접하는 것과 그냥 마시는 것의 간극이 매우 크다고 체감했기 때문이다. 강의를 할 때 2시간 가량 이론수업을 한 후 나머지 1시간 동안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하는데, 방금 습득한 정보를 토대로 추론해 와인의 향과 맛을 느끼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고리로 연결돼 뇌릿속에 강렬하고 오래 남는다.


혹자는 그 돈으로 차라리 여러 와인을 접해보면 되지 않냐고도 한다. 하지만 수업 1회당 5~6가지의 와인을 맛볼 수 있는데, 이를 직접 내 돈으로 산다고 생각하면 수업료가 결코 비싼 가격이 아니다. 그리고 와인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사람이 여럿 모여야 한 번에 그렇게 많은 와인을 딸 수 있을테니 여러 종류의 와인을 동시에 놓고 비교 시음할 수 있는 기회가 그리 많지도 않다.


자격증 취득의 목표를 낮게 잡아 어떤 와인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내 취향을 파악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활동이란 게 내 판단이다. 최근엔 코로나19로 모임 활동이 활발하지는 않지만 와인이라는 동일한 취미를 가진 이들을 교육기관에서 만나 스터디를 꾸리고 꾸준히 교류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라고 본다.

이론 수업이 끝나면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하는 시간을 갖는다.




WSET 3를 취득한다고 해도 내가 와인 업계에서 일하거나 이 소박한 지식으로 돈을 벌 일은 아마 희박할 것이다. 다만 밥 벌어먹고 살기 힘들다고 해서 퇴근 후의 시간에 멍하니 영상물을 틀어놓고 술만 마시기엔 좀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 말이다. 머리도 쓸수록 좋아진다고 하는데, 100년 사는 동안 꾸준히 인생대유잼으로 살려면 새로운 지식으로 뇌를 콕콕 자극해줘야 하지 않을까? 아는 만큼 보이니까 많이 알면 와인이 더 맛있지 않을까?


서서히 국경 간 이동도 자유로워지는 분위기다. 앞으로의 여행에선 와인 맛을 예전보다 더 적확하게 기억하고 기록할 수 있게 됐다. 역마살 낀 술쟁이는 설렌다.

이전 12화 "친구들아 랑카위 갈래? 술이 싸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