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비평)은 기본적으로 비판이론의 비판이론이기 때문에 고전과 고전에 대한 비판이론과 그것에 대한 페미니스트 비판의 계보를 알고 있어야 맥락적 독해가 가능해진다. 엄청난 양의 독서를 할 수 밖에 없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 모든 것을 따라가는 건 어려운 일이니 <읽기>를 멈춰야 하는 순간이 온다. 그러지 않으면 마음 속에 비평가만 백명 키워서, 한 문장도 못쓰게 되어버리는 사태가 와버리고 만다. 많이 읽고 많이 써보고 부딪히고 깨지고 그래야 생각이 섞이고 정리되고 그러는데, 그 단계에서부터 겁이 나버리면 큰 일. 스피박을 읽자고 결심한건, 아무래도 독해가 잘 안되는 텍스트들을 쌓아놓고 제일 쎈 걸 읽으면 그 다음엔 좀 나아지겠지 하는 심정도 있었다. (이게 벌써 15년전 일이네..) 하지만 너무 어려워서 스피박 전작 읽기 세미나팀을 만들어 한권 한권씩 읽어가면서 이게 무슨 신종 고문이야. 라고 투덜거리곤 했었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읽어간 이유는, 제국의 언어 체계에서 만들어진 지식으로는 지금 여기의 문제를 설명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거기엔 소화불량에 걸릴지언정 쓸만한 해석들이 있었고 복잡한 상황의 레이어를 그대로 살려둔 분석이 있었다. 하지만 정말 쉽지 않았다. 과연 스피박 열권 읽고 난 다음엔 왠만한 인문사회과학 책 읽기가 어찌나 수월해지던지.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 안준범 옮김, <읽기>, 리시올, 2022
간만에 스피박 책이, 그것도 강연록이 번역출간되었다고 해서 얼른 사봤다. 그 중에서 최근 계속 생각하던 부분에 대한 문장이 있어서 밑줄을 그어본다.
"저는 어떤 식으로든 폭력을 정당화할 수 없어요. 다만 제가 시도해볼 수 있는 건 폭력을 '읽고' 폭력의 프로토콜에 들어가 보는 겁니다. 가장 참혹한 폭력인 자살 폭탄 공격을 '읽으려' 시도한 적이 있어요. (...) 우리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상황에서의 폭력을 이해합니다. 그 상황은 우리에게 윤리적인 것을 허용하지 않지요. 이것은 폭력의 정당화가 아니예요. 교육에서의 강제나 젠더화된 폭력에서의 욕망은 전혀 상이한 것들이지요. 아무도 반응하지 않아 들릴 가능성이 아예 없을 때, 그리하여 폭력의 하나의 방도로 간주될 떼, 이 폭력을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 수단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 폭력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은 다음과 같아요. '내게 윤리적인 것이 허용되질 않았어. 내 그룹에 윤리적인 것이 허용되지 않았어. 그러니 나는 국가가 정당화하는 폭력에 반대하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거야'
제가 말하는 건 파농이 폭력을 변화를 위한 수단으로 변호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가 요청하는 건 폭력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인간의 삶은 다 동일한 무게를 지닌다는 점에 대한 이해예요" (스피박, <읽기>, 1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