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세상읽기] 2022-09-05
우리 집은 작년에야 겨우 차례를 철폐했다. 엄마가 차례를 없앴다니까 이모들의 눈이 동그래졌다고 했다. 어떻게 가능했어? 옆에서 그 얘기를 듣던 아빠는 ‘내가 한없이 물렁해졌으니까 가능했지’라고 답하셨지만 엄마는 내 덕분이라고 했다. “막내가 여성운동가잖아. 걔가 묻더라고, 엄마 이걸 언제까지 하려고. 며느리에게 물려주려고? 그 소리를 듣고 접었지.”차례를 그만하자는 얘기를 꺼낸 건 내가 맞긴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엄마 덕분이다.
나는 차례라는 의식에 이념적으로 동의할 수 없었으나 그 차례를 준비하면서 엄마가 그 의례에 보낸 마음마저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 마음은 조상님들이 자손들의 앞날을 살펴줄 거라는 기도였고, 며느리 노릇을 지금까지 잘해온 공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이었으며, 무엇보다 장성해서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이 명절을 빌미로 한자리에 모였을 때 함께 먹을 음식을 당신 손으로 만들어 먹이고 싶어 하는 마음이었다. 엄마의 마음이니 내가 다 알 수는 없지만 나는 내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에 만족했고 이것이 가족 모두를 위해 좋은 일이었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차례가 없어진 뒤 명절 연휴에 우리는 여러 이유를 붙여 여행을 가거나 이사한 집이 있으면 집들이를 하면서 서로의 집에 드나들거나 각자의 자유시간을 가진다. 썩 괜찮아서 차례 이전 상태로 돌아갈 일은 없을 것 같다.다만 나는 엄마가 차린 명절 음식에 단지 혈연 가족의 의례를 넘어선 의미가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엄마는 나의 ‘이상한’(여기에서 ‘이상한’은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의 ‘이상한’을 포함하여 비규범적이거나 다른 길에 있거나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모두 포함한다) 친구들이 명절이 되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하고 걱정하곤 했다. 십대 때부터 사십대까지 내내 그랬다. 명절 때 너네 친구들은 뭐 하니? 이런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누구는 고향집에 갔고 누구누구는 혼자 있을걸. 엄마는 명절 다음날에 음식을 잔뜩 싸서 집에 내려가지 않은 친구들과 차려 먹으라고 보냈다. 대보름이 되면 나물과 오곡밥을 같이 먹으라며 보냈고, 동지가 되면 팥죽을 쑤었다며 가지러 오라고 했다.
엄마한테 차례는 부계혈통주의를 유지하는 가부장적 의례만이 아니라 24절기 중 하나를 의미했다.어떤 절기에는 어떤 음식을 먹어야 그때 필요한 영양도 챙기고 액운도 막아준다는 그런 종류의 오래된 지혜이자, 공동체에 함께 사는 이들의 안녕을 서로서로 돌아보는 의례였다. 그런 의례가 나에게서 내 이상한 친구들에게로 이어진 시간들이 있었는데, 내 눈에 단지 가부장제의 유산으로서의 차례만 보였던 거였다. 우리 집에도 남의 집 못지않은 집안의 대소사가 있었고 부침이 있었지만 주변에 뭔가를 나눠 주고 싶어 하는 엄마의 마음까지 부서진 적은 없었다. 생각해보면 주변에 그런 엄마들이 꽤 있었다. 여러 이유로 가족과 멀어진 친구들은 다른 친구 엄마들이 싸온 음식으로 애프터 명절 파티를 열곤 했다.
이 엄마들은 왜 남들처럼 살지 않는지 다그치지 않고, 그렇게 너희들처럼 다르게 살아도 함께 의지하면서 지내면 좋지 않으냐고 때로는 격려하고, 때로는 부러워도 하며 다양한 형태의 친족 및 돌봄 네트워크에 본인도 모르는 방식으로 호혜 경제의 씨앗을 심었다. 다시 차례상을 차리는 일은 없겠지만, 이것이야말로 부권제의 질서가 아니라 엄마들이 준 사회문화적 유산이 아닐까 싶다.최근 1인 가구가 전세계적으로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은 2021년 기준 33.4%가 1인 가구로, 전체 가구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2000년 15.5%에서 2배 이상 증가했다. 소위 ‘정상가족’을 상징하는 4인가구는 같은 기간 31.1%에서 14.7%로 감소했다.
이전과 같은 형태의 가족 문화가 유지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제 우리는 생물학적인 연결과 규범적인 이성애에 의지해서 만들어진 정상가족에 대한 환상을 깰 때가 됐다. 인류학자 로런 실버의 제안처럼, 비규범적이고 파괴적이라는 이유로 가족 바깥으로 축출되었거나 전통 가족 문화의 규범적 질서에 영 맞지 않는 존재들이 모여 새로운 친족 관계를 만들자. 세계에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 욕망을 위한 열린 공간을 지어내자. 다른 방식으로 다시 모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자. 각자 발견한 유산을 가지고.
기사 링크 :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5759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