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자 한겨레에 쓴 칼럼. 원래는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과 SPC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 '혼자서 일하지 않을 권리'에 대해 쓰고 있였는데 참사 직후라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음이 다른 죽음의 어깨를 걸고 밀려내려온다. 황정은의 소설에 나오는 '나'의 소망처럼 나 역시 아무도 죽지 않는 글을 쓰고 싶다. 이렇게 계속 죽음이 밀어닥쳐오는 삶 속에서는 너무 어려운 일이 되고 있지만. 친구공개로 쓴 글을 칼럼에 인용하는걸 허락해주신 쪼이님께 감사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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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에서 대형 인명 사고가 발생했다. 참사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태원동 호텔 옆 38평 정도 되는 좁고 경사진 골목길에 사람들이 밀도 높게 서 있다가 앞으로 쏠리듯 밀리면서 생겼다는데 이게 우발적 참사인지, 행정력의 미비로 인한 인재인지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바 없다. 이 죽음이 정말 불가피했을까. 당혹스러운 심정으로 뉴스를,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서 공유되는 소식을 읽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을 때 책임을 물을 곳이 불분명하면(혹은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책임을 부인하면), 사람들은 만만한 희생양을 찾아 책임을 떠넘기려고 한다. 이번에 희생양으로 가장 먼저 선택된 것은 핼러윈 데이의 무국적성과 상업화된 기념일 문화였다. 한국 문화의 정통성은 혼종성 그 자체에 있는데도 말이다. 두번째 과녁은 사건 당일 현장에 있었던 이들에게 겨누어졌다. 응급구조대원이 심폐소생술을 하는 동안 참가자 일부가 응급차 옆에서 춤을 추고 있는 짧은 동영상이 특히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이태원에 있던 사람 중 일부는 사건 발생 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홍대 클럽으로 가서 놀았다는 고발(?)도 이어졌다. 이것은 모두 인간성 상실의 증거로 간주됐다.
쪼이는 어제오늘 홍대 클럽에 있었다. 상황을 알고도 그랬다. 새벽 4시가 넘자 이태원에서 홍대 클럽으로 넘어온 사람도 있었다. “신나는 노래가 나오고 춤추고 있어서 개념 없어 보이죠? 그 끔찍한 사태를 목격하고도 어떻게 또 클럽으로 가나, 이상하죠? 제가 대화 나눈 사람은 트라우마에 절어 있었어요.” 쪼이는 혼자 집으로 가고 혼자 잠드는 게 생각만 해도 끔찍해서 아침 9시까지 클럽에 있다가 왔다고 했다. “아마 이태원에서 넘어온 그 사람도 그랬을 거예요.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무개념’, ‘미친놈’들도 물론 있겠지만, 이런 상황을 소화하는 단계와 방식이 다 다르다는 걸 사람들이 많이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쪼이의 이런 해석이 우리를 인간으로 다시 묶어준다.
압사 당시 상황을 상상해본다. 사방에 있는 사람은 나를 구해주기도 하지만 나를 죽일 수도 있다. 주디스 버틀러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타자가 입히는 상해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해내고자 하지만, 만약 상해를 막는 데 정말 성공하면 필연적으로 비인간적이게 된다. ‘자기보존의 원칙’이 인간의 본질이라면 문제는 간단하다. 우선 내가 살고 보면 된다. 그러고 난 다음에 무엇을 하건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정작 이렇게 행동하면 사람들은 자기보존의 원칙을 따라 행동한 사람에게 “인간도 아니다”라고 비난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인간다운 행동인가. 타자와 나 사이에서 동요하는 것 그 자체다. 그 동요가 우리를 인간으로 만든다. 재난 상황을 브리핑하는 소방관의 떨리는 손 같은 것 말이다.
시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위치에 있는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더 많은 행정력을 투입해도 소용이 없었을 것이라며, 참사 당일 서울 곳곳에서 일어난 시위로 병력이 분산됐다고 언급했다. 기어이 시민들에게 책임을 돌린 것이다. 이렇게 책임 회피하며 시민을 분열시키는데,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국가애도기간에는 5일간 조기를 게양하고 공무원과 공공기관 근무자들이 근조 리본을 단다고 한다. 이에 맞춰 핼러윈 행사는 대부분 취소됐다. 편의점과 커피전문점에서는 핼러윈 관련 프로모션 상품들을 매대에서 치우고, 놀이공원에서는 핼러윈과 연계된 퍼레이드를 하지 않기로 했다. 콘서트와 팬클럽을 위한 연예기획사 프로그램들도 중단됐다. 묻고 싶다. 이것이 정말 애도인가? 처벌이나 회피가 아니고?
황정은은 1996년 연세대, 2009년 용산, 2014년 세월호를 기억하는 연작소설집 <디디의 우산>에서 이런 문장을 썼다. “내가 그것을 트라우마로 생각할 수 있었던 것도 시간이 많이 흐른 뒤였어. 우리는 그 장소에서의 경험 자체를 별로 말하지 않았지. 고통스러운 기억이었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 같은 걸 겪었으니 다 안다고 생각했으니까.”
우리는 이 사태를 가까이에서 겪은 이들의 하루가 어땠는지, 그날의 신남이 시간에 따라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 온도 차이와 예측 불가능했던 비극이 어떤 자국을 남겼는지 아직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애도는 거기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그곳에 있고자 했던 욕망 자체를 과녁으로 삼는 한 우리는 아무것도 애도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