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이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있었으니, 말씀이 곧 하느님이다.
-요한복음-
물리학자들은 우리 우주에서 생명체가 태어날 수 있었던 데에는 우연이라고 믿기 힘들만큼 많고 정밀한 조건들이 필요했다고 말한다. 그 많은 조건 중에서 어느 하나만 빗나갔더라도 생명체는 태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믿기 힘든 우연이 어떤 전지전능한 신과 같은 존재에 의해 조정된 것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엄청나게 많은 우주들이 다양한 조건을 가지고 우연하게 만들어졌고(마치 무작위적인 돌연변이들처럼) 그중에 우리 우주가 있을 것이라는 다중우주적인 설명을 하는 학자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고리양자중력 이론을 만든 물리학자들 중 한 명인 리 스몰린은 블랙홀 안에서 또다른 우주가 만들어진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이때 새로운 아기 우주는 모체 우주의 법칙들을 물려받고 자라면서 새로운 법칙들을 만들어 내는 방식으로 우주도 생명체처럼 진화할 수 있게 된다.
리 스몰린의 가설도 다중우주적이긴 하지만 블랙홀과 빅뱅을 연결시키면서 우리 우주의 물리적 법칙과 조건이 이전 우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특별한 상태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주의 번식이라고 할 수 있는 블랙홀이 많이 생길 수 있는 조건과 생명체가 태어날 수 있는 조건에 공통점이 많다는 점도 근거가 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는 리 스몰린의 가설을 받아들면서 이를 일과 이야기의 관계를 통해 이해해 보고자 한다.
블랙홀에서 원자와 분자 같은 물질적인 상태는 강한 중력에 의한 밀집으로 파괴될 것이다. 여러 정보를 담은 빛 마저도 블랙홀을 빠져 나오지 못한다. 그러나 이런 밀집과 파괴의 과정에도 이야기는 파괴되지 않고, 오히려 파괴에 관한 이야기도 생성된다.
이야기는 그 추상의 형식 때문에 밀집으로 소멸될 이유가 없다. 그리고 그동안 쌓아온 다양하고 확고한 일의 내용들이 단순하고 일률적으로 된 것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더해지면서 새로운 우주를 재건하는 방향으로 일을 촉발시킬 수 있다.
이러한 태초의 이야기를 통해 우연이라고 믿기 힘든 우리 우주의 조건들이 우리 우주의 모태가 되는 우주들로부터 물려받은 일종의 유전 정보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유전 정보가 어느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 우주의 법칙과 조건들도 여러 우주들의 오랜 진화로부터 이야기로 형성되어 계승될 수 있는 것이다.
일과 이야기로 만들어가는 우리의 구상에서 흔히 말하는 신에 가장 가까운 존재가 있다면 이 태초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일종의 일이고 구체적인 일들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일어나는 일들의 신은 특별한 일이긴 하지만 일들 자신의 이야기로 만들어진 신이고 다시 일로 돌아가는 신이다.
태초의 이야기는 구체적인 일들과 함께 뻗어나가며 새로운 우주를 만드는 일에 쓰인다. 이 이야기는 특정한 자리에 제한되지 않고 우주 곳곳에서 공유된 상태로 쓰여 없어지지만, 한편으로는 보편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다시 흡수되면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앞으로 이 태초부터 이어진 이 이야기를 '펼쳐진 이야기'로 부르려 한다. 펼쳐진 이야기는 태초부터 지금까지 우리 우주의 곳곳에 널리 공유되어 작동하는 기초 법칙이자 관습으로서, 우리 우주의 무의식적인 정체성을 형성하고 유지시키는 추상적인 일이다.
그러나 영원히 그대로 작동하는 법칙이나 관습은 없다. 펼쳐진 이야기를 포함해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끊임없이 새롭고 다양한 시도로 번져 나간다. 그렇게 우주의 일들이 진행되면서 펼쳐진 이야기도 내용상의 변화를 겪으며 점차 진화할 것이다.
세계가 신에 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신이 세계에 내재한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이다.
신이 세계를 초월한다고 말하는 것은 세계가 신을 초월한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이다.
신이 세계를 창조한다고 말하는 것은 세계가 신을 창조한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이다.**
*리 스몰린, 강형구 옮김, <리 스몰린의 시간의 물리학> 참조, 김영사, 2022.
**화이트헤드, 오영환 옮김, <과정과 실재> 598쪽, 민음사,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