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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기담은 철학 Feb 26. 2024

서른아홉번째 길. 준비된 습관

심장, 근육, 신경, 세포 등에는 어떤 영혼이 있다고 해야 한다. 하지만 이 영혼은 응시하는 영혼이며, 이 영혼의 모든 역할은 습관을 수축하는 데 있다.*
- 들뢰즈 -



습관은 반복되는 일의 모임이다.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습관적인 일을 해야 한다. 존을 위한 본능적 습관을 멈추는 것은 곧 죽음으로 이어진다.

본능적 습관을 자세히 살펴보면 구체적인 일들로 이루어져 있다. 어느 하나 물리 법칙을 거스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그 수많은 일들이 생명의 유지와 전수라는 일관된 목표를 향해 있다는 것이 특이다.

목표라는 것은 이야기의 상태로 존재하면서 일할 수 밖에 없다. 많은 일들이 다르게 일어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는데도, 수많은 가능성을 제한하고 목표를 향해서 진행한다. 목표는 일의 결과로 나타나지만, 그 결과가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가상의 상태로 일한다.


생명체의 습관은 미리 준비하는 습관이다. 현재 진행되는 이야기의 결말은 죽음으로 향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로 일어나기 전에 수정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 최종 목표와는 다른 개별적인 이야기의 활동이 있어야 한다. 현재의 일의 진행에 대한 대안이 제시되고 실행되어야 한다. 대안이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실행되어야 할 세세한 이야기이고, 대안이 단순히 상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필요한 순간에 일어나기 위해서 구체적인 준비가 필요하다.

일어날지 안일어날지 모르는 가상의 일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에 그러한 상황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준비된 일은 습관적으로 실행된다.


이야기는 이렇게 생명의 탄생과 유지에 필요하지만, 이야기가 일으킬 수 있는 힘은 사실 그리 크지 않다. 고차원의 이야기를 활용하는 인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상상만으로는 어떤 동작도 구체화되지 않는다. 이 진행하는 여러 시도 중에 관련된 이야기가 더해지면서 그 방향으로 일어날 확률을 높이는 것이 이야기가 일하는 방식이다.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거나 말 한마디 내뱉는 일도 관련된 근육이 움직일 수 있는 구체적 과정 전체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일으킬 수 없다. 의식의 명령은 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을 얹는 것보다도 약한 힘을 발휘한다. 언제든지 발대기 중인 뇌신경의 신호가 일어날 가능성을 강화하는 것이 의식의 명령이라는 이야기가 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말을 해야 할 그 시점을 좌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삶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이야기만으로는 어떤 물질을 만들거나 파괴하지 못한다. 이야기만으로는 어떤 물질을 이동시키거나 멈춰 세우지 못한다. 그러나 일에는 항상 이야기가 끼어들 여지가 있다. 일은 고정불변하는 상태의 연속으로 일어나지 않고, 항상 먼저 일어난 결과에서 다음 진행을 다양하게 시도한다.

일이 불확실하고 확률적인 시도의 이야기가 되는 순간, 미리 있었던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끼어들 틈이 생긴다. 이때 이야기가 끼어들기 위해서는 이야기의 내용이 서로 들어맞아야 한다. 상상의 움직임 그 근육에 해당하는 뇌신경 신호의 세세한 내용과 적절한 강도를 포함하지 않는다. 움직임의 실제적인 명령은 그 세세한 부분까지 포함한 이야기여야 한다.


복잡한 분자들이 만나는 세포 수준의 일과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들에는 세포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세세한 내용을 가상의 정보로 포함하고 있다. 이야기의 내용이 서로 들어맞을 있는 이유는 이야기가 일의 시도에서 생겨나고 다시 그 시도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런 방식으로 이야기를 통해서 서로 다른 일들이 관련성을 갖게 된다. 특히 단편적인 이야기의 연결을 통해 일의 진행 결과가 실제로 일어나기 전에, 목표나 예측이라는 가상으로 작동할 수 있게 된다.

다른 사람의 생각하는 이야기가 그 사람이 하는 일이나 말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을 볼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의 이야기 자체만을 볼 수는 없듯이, 세포에서도 이야기가 작동하는 것을 추정할 수는 있지만 그 이야기 자체를 확인할 수는 없다. 이야기는 일을 통해서 그 활동이 구체화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몸체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 <진드기>는 빛에 이끌려 나뭇가지 첨점까지 오르고, 포유동물의 냄새를 맡으면 포유동물이 가지 밑을 지날 때 자신을 떨어뜨리고, 가능한 한 털이 적게 난 곳을 골라 피부 밑으로 파고 들어간다. 세개의 변용태, 이것이 전부이다. 나머지 시간에 진드기는 잠을 잔다. 때로는 수년간이나, 광대한 숲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무관심한 채.**



*질 들뢰즈, 김상환 옮김, <차이와 반복> 178쪽, 민음사, 2004.

**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김재인 옮김, <천 개의 고원> 487쪽, 새물결, 2001. (목표물이 내가 될 수도 있기에 반가운 소식은 아니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진드기는 동물의 냄새와 함께 적외선을 같이 감지한다고 한다. 떨어질 때정하는 한 번의 선택을 위해서는 냄새보다는 적외선이 더 정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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