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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기담은 철학 Mar 08. 2024

마흔번째 길. 이야기의 맥락

삶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사건은
스토리가 되기 전에는
순간순간의 조각난 경험들로
흩어져 있다.
- <이야기의 끈> 중에서 -*



사람들이 만들고 전하는 수많은 이야기들은 현실에 바탕을 둘 필요는 없다. 상상력만 따라준다면 얼마든지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창조할 수 있다. 지어낸 이야기의 규칙은 이야기하기 나름이다. 지난 밤 꿈처럼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도 있다.

그래도 이야기가 가진 성격이 있는데, 앞뒤 맥락을 맞춰볼 수 있다는 것이다. 꿈의 이야기들이 앞뒤가 안맞는다는 것은 앞뒤 사정을 같이 볼 수 있기 때문에 알게 된다. 이야기는 순차적으로 진행되고 여러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되지만,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부분의 진행을 볼 수 있을 때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인 일의 진행에서 앞뒤의 연결은 빈틈 없이 이어져 보이고, 물질들은 전체적인 일의 진행 상황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어 보인다. 이렇게 세계가 구체적으로만 진행되어 이야기의 자리가 없다면 일의 시간은 선분 위를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점을 벗어나지 못한다. 지난 역사는 완전히 사라지고, 빛과 진동에 담긴 정보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세계에서 일과 이야기는 공존하고 있다. 양자역학은 이 공존이 피상적인 공존이 아니라 세계의 본질적인 공존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생명이 진화한 역사는 구체적인 일로부터 이야기를 추출해서 가공하고 활용하는 방법을 전수해온 이야기다. 그래서 넓은 의미에서 이야기를 공유하고 전수하는 문화는 단세포 생물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세포는 추출한 이야기를 필요한 습관을 구체화하고 준비하는데 쓴다. 세포들의 거대한 모임인 식물에서는 분업화된 습관을 준비하고 실행한다. 한편 뚜렷한 의식이 있는 동물의 뇌는 많은 이야기들을 압축하고 번역해서 현실같은 가상 세계로 재구성한다. 우리는 이 재구성된 이야기 세계를 진짜 세계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세포에서 활동하는 물질들의 이야기는 다시 구체적으로 쓰일 수 있는 확실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 끈에서 멀어질수록 이야기는 현실로부터 더 분리되고 대신 더 큰 자유를 얻는다. 구체적인 일들이 뚜렷하게 분리되어 일어나기 때문에 우주는 안정적인 일의 작업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야기는 가상의 자유로운 연결을 통해 분리된 일들을 거시적인 맥락 속에서 일어나게 한다.

생명체는 각각의 이야기 프로그램을 활용해 물질로부터 보다 가치 있는 삶을 생산하고 있다. 




인간의 서사적 능력 덕분에 우리 삶은 시간의 혼돈과 공허 속에서도 의미 있는 경험으로 변형될 수 있다.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은 이질적인 것들을 종합하여 통일성과 연속성을 창안하는 일이기도 하다. 삶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사건은 스토리가 되기 전에는 순간순간의 조각난 경험들로 흩어져 있다. 우리는 날마다 조각난 경험들의 전후 맥락을 찾아내고, 그것들 사이에 관련성을 부여하고, 개별적인 상황과 사건들을 결합하여 이야기를 만들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뜻에서 인간은 누구나 서사적 존재이다...

부단히 이야기를 만드는 인간의 서사화 행위는 혼돈스러운 세상에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안정감과 안도감을 얻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과도 맞닿아 있다. 서사적 욕망은 서사적 존재인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이라 할 수 있다.*



* 김상환 외 7인, 논문집 <이야기의 끈> 41~43쪽 (박진, [서사와 삶: 이야기하기의 실존적 의미] 중에서), 이학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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