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의 대결을 다룬 영화를 보면 주인공의 행동에 답답할 때가 자주 있다. 대개의 경우 지켜보는 우리는 주인공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 저쪽에서 악당들이 나쁜 일을 꾸미고 있는데, 주인공은 그것도 모르고 그 계략에 휘말려 들어간다. 물론 주인공은 결국엔 그 계략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나지만 말이다.
답답하긴 하지만 주인공이 악당의 계략을 미리 알기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이해한다. 악당은 주인공과 다른 공간, 다른 시간에서 일하고 있다. 영화는 이 분리된 일들을 보기 좋게 이어놓는다. 그러나 텅 빈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영화는 악당의 계략으로 인한 주인공의 위험을 알아줄 관객이 없다. 애써 모은 정보들은 화면과 소리로 표현되며 지나간다.
뇌에서는 수많은 신경세포들이 활동하면서 정보를 처리하고 있다. 우리가 뇌의 종합적인 활동을 물질들의 이동이나 에너지의 변환 같은 것으로 이해하려 한다면, 그 이해(이야기로 엮음)는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 남을 것이다. 과학적 유물론은 신비주의와 서로 의존하며 이원론을 만들고 있다. 주인공과 악당처럼 서로 제거하려 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서로 존재감을 키워주는 짝이 된다.
신경세포들의 활동과 지켜보는 의식 사이에는 수많은 일과 이야기가 있다. 세세한 일들이 어떻게 거시적인 이야기가 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돌이킬 수 없이 확고한 일들과 함께 말도 안되는 허황된 이야기들까지 모두 현실의 어떤 측면들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감각으로 재구성된 세계는 공동 작업의 결과다. 기획과 제작, 작가와 감독, 스탭들, 배경들, 등장인물들, 영화관, 관객은 이 공동 작업과 관련된 어떤 부분 작업들이다.
일에서 다뤄지는 내용은 물리적인 내용들에 제한되지 않는다. 감각을 구성하는 내용들도 다른 내용으로 완전하게 대체할 수 없는 그만의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물리적인 일들의 구분되는 내용들은 자리의 구분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두 개의 분자가 같은 자리를 차지하기 어렵다. 같은 자리에 있는 시도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시도라서 뚜렷한 결과를 내기 어려운 것이다. 그나마 서로 결합된 물질들은 시도와 결과의 리듬을 맞추면서 다음 일을 함께 시도할 수 있다. 아니 리듬을 맞출 수 있기 때문에 결합해서 함께 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리적인 내용들은 서로간의 맥락을 연결할 겨를이 없이 바로 다음 결과를 도출하며 쓰인다. 생명체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욕구, 습관, 준비 같은 맥락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물리적인 일들에서도 일의 진행에 대한 이야기들이 남아서 이를 수집하고 연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뇌의 신경세포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구체적인 결과들을 만들며 지나가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남긴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은 신경세포 활동에 대한 이야기이지 외부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외부세계에 대한 정보들은 이들 사이에 숨겨져 있다.
이 암호로 숨겨진 이야기를 즉시 변환하기 위해서는 다른 준비가 필요하다. 신경세포들은 전기 화학적 변화를 통해 비슷한 방식의 신호를 주고 받을 뿐이다. 단순한 신호로도 무한에 가깝게 구분되는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준비된 신호 변환이 필요하다. 뇌에서 활성화되는 부위를 실시간으로 촬영할 수 있는 기술이 있지만, 그게 무슨 활동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선행 조사가 필요하다. 다양한 감각, 감정, 기억, 상상을 구분하고 가공하고 저장하는 것은 뇌신경의 신호 전달 방식 자체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감각의 내용들도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물리적인 내용들보다는 자리의 제한이 덜하다. 색깔들과 모양들은 옆으로 완전히 이어질 수 있다. 색깔과 소리와 향기는 같은 자리에서 표현될 수 있다. 감각을 이루는 내용들은 오랜 경험의 이야기 속에서 찾아졌을 것이다. 빛에 대한 수많은 경험들을 대비시켜 그 대비를 직관적이고 종합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명암, 색깔, 모양을 찾는 일이 서서히 시도되었을 것이다.
신경세포 신호 자체는 광범위하게 종합될 수 없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는 종합될 수 있다. 그래서 종합된 신호들의 정보가 서로 대비되면서, 대비의 양상이 비슷한 감각 내용들과 연결되어 변환될 수 있다.
세계를 만들어가는 일들은 끊임없이 결과를 남기면서 다음 진행을 시도한다. 그와 함께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새로운 내용이 추가될 수 있어서 흩어져 일어나는 일들의 정보들은 종합될 수 있었다. 그래서 악당이 계략을 모의하는 장면은 지나갔지만 주인공의 지금 상황과 겹쳐지며 위험을 느끼고 긴장감은 고조된다.
심적 이미지는 신경 지도 수준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정보의 통합과 조작을 용이하게 해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마도 이러한 새로운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심적 수준에서의 작용이 '기존의' 신경 지도 수준 이외에 추가적인 생물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데카르트의 사상에서처럼 심적 수준의 생물학적 작용이 또 다른 실체에 기초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복잡하고 고도로 통합된 심적 절차에 의한 이미지는 여전히 생물학적이며 물리적이라고 볼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심적 이미지가 없다면 생명체는 안녕은 차치하고 생존에 필수적인 대규모의 정보 통합을 적시에 이루어 내지 못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아 감각이나 자아 감각을 포함하고 있는 느낌이 없다면 그와 같은 대규모로 이루어지는 정보의 심적 통합이 삶의 문제, 즉 생존과 안녕의 성취로 향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