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임 병원을 다니면서 사람들에게서 들은 멘트들에도 많이 상처를 받았지만 실제 병원이나 커뮤니티에서 사용되는 단어들에서도 굉장히 상처를 받았었다. 난임을 여자의 문제처럼 치부하고 있는 용어들이나, 어느 한쪽을 장애 취급하는 용어들이 생각 외로 많은 것에 굉장히 놀랐더라는. 외국 의학용어를 그대로 직역해서 사용하는 경우들이나 기존에 사용되던 단어들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해오고 있는 것도 이유 중 하나인 것 같았다.
아기를 품는 여성 장기의 명칭인 자궁부터 한자로 子宮 (아들 자/집 궁)이니 애초부터 불공평하게 시작된 단어 문제가 아닐까.
난임(難妊)이라는 단어는 2011년 표준국어사전에 등재가 된 단어이다. 그전엔 불임(不姙)이라고 했으니 얼마나 많은 부부들이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틀에 갇혀 있었을까. 어렵다는 뜻과 불가능하다는 뜻은 정말 천지차이인데. 난임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변화되어 가고 있지만 아직 난임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건 여전히 걸음마 단계가 아닌가 싶다. 아직도 난임인 것을 숨기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현실이니까.
하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엔 여자가 애를 못 낳으면 쫓겨났다 하니. (그 시절엔 남자가 무정자증이라도 무조건 여자 잘못이라 했으니 억울해서 미칠 지경이었을듯)
난임의 세계에 발을 들이면서 납득이 안 갔던 단어들이 몇 가지 있었다. 나열하는 단어들은 바꾸거나 사용되지 말았으면 싶다.
1. 고사 난자
빈 아기집이라는 판정을 받고 난 뒤 가장 먼저 들은 이야기는 '고사 난자'였다. 이 단어를 들었을 때 참 기분이 나쁘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고사는 나무나 풀 따위가 말라죽었다는 뜻인 것 같은데 그럼 왜 난자가 말라죽었다는 단어일까. 마치 여성의 난자에만 문제가 있는 듯한 뉘앙스의 단어에 격분했던 기억이 난다.
실제 해외 의학용어에서 blighted ovum이라는 단어가 쓰여서 (blighted - 엉망이 된/ ovum - 난자) 우리나라에서 고사 난자라는 말로 변경되어 사용된 것 같은데 실제로는 계류 유산(missed abortion)으로 명명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이 단어 뜻 역시 의학적 임신 중절/낙태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blighted embryo(고사 배아)라고 변경해야 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대체 외국에선 왜 저 용어에 난자라는 단어를 끌어들여서 명기했을까? 실제로 아기가 집만 짓고 태아로 발달하지 못하는 것이 비단 난자의 문제만은 아닌데.
2. 습관성 유산
임신 20주 이전에 3회 이상 유산을 하면 이렇게 명명하며, 병원이나 한의원에서 아주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용어이다. 의학용어로는 recurrent pregnancy loss라고 명기하는데 왜 우리나라에서 이게 습관으로 바뀌었는지. recurrent는 반복적이라는 뜻인데 그냥 직역해서 반복으로 정의하지 않고 습관이라고 말하기로 했을까? 반복적 유산을 검색해도 습관성 유산으로 링크가 넘어가는 걸 보면 우리나라는 반복보다는 습관성을 메인으로 사용하기로 했나 보다.
많은 사람들이 습유 검사, 반착검사라는 용어를 난임 월드에서 사용하고 있다. 습유 검사는 습관성 유산 검사, 반착검사는 반복 착상 실패 검사인데 워낙 말줄임을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성상 이렇게 부르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왜 유산은 습관이고 착상은 반복인지.
대체 유산을 습관화하려면 부부가 무슨 짓을 하면 되는 걸까?
3. 태아 살해 세포
일부 난임부부들에게서 nk 수치 이상으로 면역치료를 진행하는 경우가 있다. nk cell 은 면역세포인데 요즘 TV광고에서도 nk 수치를 높이자면서 약 광고를 한다. nk세포란 natural killer cell의 약자로 우리 몸에서 바이러스에 감염된 세포나 암세포를 파괴하는 면역세포를 의미한다.
암을 공격하는 세포라 많으면 좋을 것 같은데 이 세포 수치가 높으면 배아를 세균으로 인식해서 공격한다고 난임 월드에서 알려져 있다. 해서 병원에서는 이 세포를 검사해서 수치가 높으면 약을 복용하거나 링거를 주입해서 강제로 면역력을 낮춘다. 하지만 의료계에서도 이 nk세포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데 nk세포 활성화로 인해 유산이 된 것인지, 유산으로 인해 nk세포가 활성화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로 면역을 낮춰서 임신유지에 성공한 케이스들이 있으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인 난임부부들은 비싼 비용을 지불하면서도 면역치료를 받고 싶어 하는 것이 현실.
그런데 이 세포를 태아 살해 세포라고 부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용어가 너무 잔인하다. 내 몸의 세포 체계가 내 태아를 살해한다니. 누가 만들어 낸 끔찍한 용어인지 모르겠지만 사용 안 했으면 하는 용어 중 하나.
4. 불임
난임 병원에서 용종을 제거해야 한다는 판정을 받고 자궁경 시술을 하고 나서 실비보험을 청구하기 위해 서류를 병원에서 받아서 보험사로 넘겼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험사에서 연락이 왔다. " 고객님 첨부해주신 진단서에불임으로(N 97.9) 나와있는데 불임 코드로는 보험 보장이 안됩니다. 자궁폴립 수술이면진단서 새로 발급해서 다시 청구해주시겠어요?"
전화를 받으면서 담당자가 '불임'이라는 단어를 언급한 것에 굉장히 놀랐다. 내가 불임이라니? 이후 자궁내 폴립 제거 코드(N84)로 진단서를 변경 제출해서 실비 보장은 받았지만 기분이 나쁜 건 여전했다. 그런데 의료계, 보험계에서는 난임이 아닌 불임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고 코드번호에 불임이라고 나와있으니직원은 나에게 불임이라고 말한 것이었을 뿐. 왜 아직도 이 단어가 고쳐지지 않았는지 정말 의아할 따름이다.
5. 노산
여전히 병원에서는 나에게만 노산이라고 한다. 남자에게는 노산이라는 말을 한 60살쯤에나 할 듯하다. 왜 비단 여성의 나이만 가지고 늙다 젊다를 판단할까.
일전에 진짜 가짜를 고르는 프로그램에서 신혼부부의 기준을 여성 나이 만 49세 이하로 기준한것이 사실일까 아닐까를 물은 적이 있다. 난 지금이 2020년인데국토부가 미치지 않고서야 저런 기준을 댔다고?라고 했지만 저 정부기관은 미친 게 맞았다. 여성만 신혼부부 기준에 나이 제한이 있었던 것. 여성의 가임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기준이라니 웃음밖에 안 나왔다. 전엔대한민국 출산 지도를 만들더니 이것들이 진짜 미쳤군이란 말밖에 안 나오더라는. 여자가 애낳는 도구인가?
난 만으로 38세고 병원에선 나보고 노산이라고 했다. 이 노산이라는 말 때문에 난 알게 모르게 계속 위축이됐고 왜 동갑인 남편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나만 계속 늙었다고 하는지에 대해서 많이 속상했다. 의학적으로 그렇다는데 그냥 억울했다. 나는 노산이고 여자의 의무(?)를 제 때 다하지 못해서 뒤늦게 아이를 가지려니 애가 안 생기는 실패자 군에 던져진 것 같은 기분.
시부모님의 아이 타령에 남편과 싸울 때면 울며불며 나 버리고 젊은 여자랑 결혼해서 애 낳고 잘 살라며 소리 지른 적도 몇 번 있었다.
만 35세 기준은 여러 가지이유로 만들어졌겠지만 노산 프레임에 끼워진 사람들의 고통과 죄책감은 전혀 반영하지 않은 것 같다. 당신들이 뭔데 열심히 살아온 여자들을 노산이라는 말 한마디로 후려치는 건데? 그렇게 출산율이 걱정되면 나라에서 무상으로 난자 냉동시켜주고 보관해주든가. 어차피 난자 얼리려면 과배란과 채취로 몸 상하는 건 여자인걸.
내가 다니는 병원은 여성의학연구소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실제로 난임 병원 중에 난임을 명시해서 간판을 달고 있는 곳은 없다. 그냥 일반 산부인과랑 구분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난임 병원이라 부른다.아마 난임 병원이라고 간판에 쓰여있으면 선뜻 못 들어갔을지도 모르겠다.불임 병원이라고 되어있었으면 아예 발도 안 들여놨겠지.
난임이 항생제를 좀 먹거나 칼로 좀 째서 해결될 일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터널을 나서는 줄 알았다가 더 큰 상처 더미만 얹어서 짊어지고 돌아온 지금은 기운이 하나도 나지 않는다. 저런 단어들이 보이면 소심하게 분노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