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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근쥬스 Mar 29. 2022

코로나는 우리 가족에게도 덮쳐왔다

유난하다 소리를 들어가며 지침을 지킨 우리 가족들은 그나마 괜찮을 줄 알았다.

오산이었나보다.




20년 초부터, 정확히는 19년 말부터 우리를 덮쳐온 코로나 사태에 가장 먼저 반응하신건 아빠였다.

펜데믹 이후 늘 우리의 단톡방에는 행사 때마다 늘 아버지가 먼저 남기신 '코로나가 심하니 모이지 말자' 로 시작되었다. 그렇다 보니 정말, 정부의 지침이 완화될 때마다 가끔 가족들의 얼굴을 봤다.

내 나이가 마흔이 넘었으니 당연히 부모님은 연세가 있으셨고 기저질환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각 지역에 떨어져 살고 있는 우리들은 더더욱 부모님의 '오지 말라'는 이야기를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활발히 사회생활중인 자식들이 부모님을 감염시킬 수 있는 우려가 컸으니까. 


코로나 첫 해에는 부모님 생신파티도 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세상 처음으로 계좌로 돈을 부쳐드리면서 죄송스러웠던 마음이 들었던 해였다.


그래도 손주들은 보고싶어 하실 것 같다며 둘째 동생네는 방역지침이 완화될 때 마다 조카들을 데리고 엄빠집에 쳐들어 갔더라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렇게 살아온지 벌써 3년차.

뉴스에서 들려오던 확진자 소식이 드디어 우리 가족을 덮쳤다.


오미크론 변이가 덮쳐오고 있다는 기사는 1월부터 뉴스를 도배하고 있었다.

개학을 앞둔 나로서는 한 달만이라도 좀 잠잠해질 때까지 원격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하지만 학교 현장의 요구를 무시한 채 전면등교가 강행되었고, 나는 지인들에게 1순위로 만나지 말아야 될 사람 리스트에 들어갔다. 


20년도 물론이었지만 이 사태가 나아질거라는 희망이 산산이 부서져가며 21년 한해동안 참 힘들게 학사행정을 끌고 왔던 터라 모든 사람들은 다 같이 생각했을거다. 그래서 제발, 한 달 만이라도 원격수업으로 이 확산의 추세를 늦춰보자고 다들 바랐다. 하지만 교육부는 강경했고 결국 학교의 문은 열렸다.


사실 학교가 열리면 좋은건 모두다. 나 역시 아이들과 대면수업 하는 것이 좋았고, 아이들 역시 학교에 나오는 것이 좋았을 터. 학부모님들은 오죽했을까. 들뜬 마음으로 등교하는 신입생들과 함께 살아 움직이는 듯한 학교를 다시 보는 기분이 다들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설렘 가득한 신입생들과 개학해서 들뜬 마음으로 등교한 학생들과 만나는 것은 기쁜일이니까.


그런 기쁨도 잠시, 2년 가까이 제대로 학교 생활을 못했던 아이들은 단체생활의 기본기 조차 갖추지 못한 채로 등교를 시작했고 역대급 신입생이라는 이야기들쏟아지기 시작했다. 등교 일주일차에 학폭이 터졌고 다들 혀를 내두를 사건들의 연속이 시작된 터에 모두가 혼이 쏙 빠져나감과 동시에 교직원과 학생들의 확진이 무더기로 터져나왔다.


개학 전에 이미 방역지침은 완화 되었고, 교직원의 확진에는 어린이집의 확진사태가 일조했다. 대부분의 확진 교직원들의 추이를 봤을 때 어린이집에 다니는 자녀의 확진->교직원 확진 으로 이어졌던 터. 개학 전 전체 교직원 회의에 열명 남짓의 교직원이 출근하지 못하는 상황을 보고 모두가 우려스러워 했지만 이미 일은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었다. 


3월의 학교는 진짜 미친듯이 바쁘다. 전 교직원들이 숨을 못 쉴 정도로. 

새학기의 업무 폭탄 속에 학사일정이 시작되는데 우리의 경우 수업계 선생님의 확진으로 인해 개학날 임시 시간표가 나오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보통 2월 말에 나온다)


2월 말 담임선생님의 확진으로 1주일 가까이 내 담임 선생님의 얼굴도 모른 채 임시 담임체제로 시작된 반이 여러 반이었고, 각 반마다 연일 5~6명의 확진자가 기본으로 쏟아졌다. 많은 반은 10~15명 이상씩 확진자가 쏟아져 나오는 통에 일부 반은 방역지침에 따라 원격수업으로 돌려졌고, 해당 반 학부모님들의 민원은 교무실 전화를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다. 차라리 전 학년을 원격수업으로 돌리지 왜 우리 애 반만 원격이냐며. (그러니까 말입니다.........)


그 난리통에 확진이 아닌 교사들에게 쏟아진 것은 보강 폭탄이었다.

확진 교사는 1주일간 출근이 불가했기에 해당 교사의 수업이 다 펑크가 나는 상황이니 확진자가 터지면 대체교사를 투입해야 한다. 하지만 당장의 수업결강에 바로바로 투입할 대체교사가 있을 리 만무한 터. 교육부에서는 코로나 격리로 인한 대체교사, 기간제 교사 인재풀을 운영하니 마니 말이 많았지만 기간제 교사가 1주일 수업하러 나오는 일은 거의 없고(어느 기간제교사가 언제 생길지 모를 1주일 자리를 기다리는가. 최소 한학기 짜리 자리를 구하지... 그리고 채용 절차와 기간이 그렇게 녹록하지 않으며 다급하게 공백 생긴 날짜에 바로바로 기간제 교사를 구할 수도 없다. 현실을 완전 망각한 이야기) 결국 교내에서 해결해야 하다 보니 수업계 담당 선생님만 죽어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래서 나 역시 숨넘어가는 수업계 선생님과 함께 시간이 나는 대로 보강에 넣어달라 해서 새학기 결강 폭탄 해소에 일조를 했다. 모두들 내가 도와주면 나 일터졌을 때 도와주겠지 하는 상부상조의 마음이었을거다. 

  



3월 개학 후 학교와 학생들은 모두 우리가 오미크론 사태의 총알받이냐며 극도로 분노했다. 오죽하면 교육부장관 남편이 급식사업을 해서 강제로 학교를 열게했다는 이야기까지 돌았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학교가 시작이 아니었다.

올 초 부터 어린이집과 유치원이 더 큰 문제였던 것.


7세 미만 아이들이 다니는 어린이집과 유치원은 맞벌이 부부의 마지막 보육의 보루였고 결국 이 곳의 방역이 완화되면서 아이들이 확진일 수도 있는 상태로 무작정 등원을 시작했던 것이었다. 둘째는 매일 아이들이 기침하고 콧물나고 난리부르스인데 자꾸 원에 나온다며 걱정을 토로했다. 


아이들이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 마스크를 잘 끼고 생활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어불성설이다. 자녀가 있는 분들이라면 알 것 이다. 그나마 마스크를 쓰는 아이가 있고 안쓰는 아이가 있다는 것. 그리고 잘 쓰는 아이라도 하루 종일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마스크를 쓰고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고등학생들도 종일 마스크 쓰고 있으라 하면 미치기 직전까지 간다. 


마치 방역 완화와 학교의 전면등교가 오미크론의 기폭제처럼 이야기 되지만 사실 가장 선두에서 터진 것은 어린이집과 유치원이었다. 학교는 3월에 개학했으니까. 어린이집과 유치원은 1, 2월 동안 계속 운영이 되어왔고. 이미 2월부터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는 대거 확진자가 터져나와서 우왕좌왕 하는 상황이었는데 희한하게 뉴스에 대서특필되지 않았다.  


나 역시 엄마와 여동생이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있는 상황이라 사태를 예의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2월부터 들려오는 "우리 반 애가 확진이 나왔어. 동료 선생님이 확진이 나왔어" 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조심해" 뿐이었으니까.


언제고 우리집도 곧 터질 것 같은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기분이었다.


결국 중학교 교사인 남동생이 어제 확진 소식을 알려왔고, 목이 쉰 채로 통화를 하고 나니 마음이 좋지 않던 감정이 다 지나가기도 전에 오늘 어린이집 교사인 여동생이 확진 소식을 전해왔다. 목이 너무 아프고 힘들다는 막내와 몸이 너무 아픈데 어쩔 수 없이 조카들을 데리고 있어야 한다는 둘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그동안 오미크론은 무증상이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를 한 사람들에게 분노를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허탈해하는 둘째가 한 말이 계속 맴돈다. "언니,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막 돌아다닐걸 그랬어. 3년동안 잘 버텼는데 이게 뭐람?"


지금은 그저 어쩔 수 없이 걸린 것이니 동생들이 조금이라도 덜 아프게 코로나를 이겨냈으면 하는 바람 뿐이다.

한편으로는 확진되었다가 돌아온 사람들이 대부분 경, 중증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것을 보면서 이기적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제발, 피할 수 있을 때까지 피하고 싶다는 마음도 든다.




일전엔 가까운 사람이 확진되지 않으면 남 일 처럼 느껴왔던 코로나였다. 하지만 결국 내 가족들을 덮쳐온 이 사태에 헛웃음이 났다. 그들이 천둥벌거숭이처럼 코로나 따위 난 비켜간다며 돌아다녔을까? 다 직장에서, 생활에서 어쩔 수 없이 바이러스랑 마주친 것이었다. 엄마는 너도 학교에 있으니 너까지 걸릴까 걱정된다 하시며 가급적 사람 만나지 말라 하실 정도니. 부모님은 물론이고 자식들의 직장이 학교니 유치원이니 어린이집이니 다들 바이러스 공격의 최전선에 있으니 오죽하시겠는가.


여태껏 나는 꼬박꼬박 접종하라는 지시에 따라 3차 접종까지 받았으며 제발 외식하고 싶다는 남편의 요구도 묵살한 채 외식도 거의 하지 않고, 사람 많은 곳엔 가지 않았으며 어딜가나 KF94 마스크를 절대 벗지 않았다. 그렇게 코로나블루를 앓아가며 살아온지 벌써 3년차가 되었는데도 이제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에 너무나 큰 무력감을 느낀다.


다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피해보고 싶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이상 코로나에 걸리지 않고, 설령 어쩔 수 없이 걸렸다 한들 가볍게 앓고 후유증 없이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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