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초 갑자기 보험료 체납 통지서가 날아와서 사람을 놀라게 만들더니 여전히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 부터 '연체'는 곧 '신용의 사망'이라는 것을 아버지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면서 자라왔다.
때문에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내야 할 돈을 연체한 적이 없었다.
이런 나에게 4대 보험이 몇 달 미납인 채로 계속 나의 기록에 남아있다? 어이가 없을 뿐 아니라 이제는 슬슬 짜증스럽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나는 당시 급여에서 보험료를 공제하고 차액을 지급 받았으니까.
퇴사 후 건보 체납 통지서가 날아온 것은 21년 3월 경이었다. 당시 이 통지서를 받은 대형 여행사 휴직 직원들이 회사를 뒤집어서 L사는 부랴부랴 체납 세액을 납부했다더라는 이야기가 들렸다.
통지서를 받고 건보 공단과 통화를 했을 때 담당자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행업 어려운거 아시면서, 아직 나이도 젊은데(국민연금 수령할 나이도 아닌데) 좀 기다려보시죠? 엄청난 금액이 밀린거도 아니고 겨우 두세달치인데. 선생님은 어차피 피해보는거 없어요."
업계가 어려운 것을 뻔히 알면서 왜 독촉을 하냐는 말투로(여행사 사장인줄) 들렸지만 당시에는 독촉 좀 더 해봐주시라는 말 밖에는 할 수 없었다. (업계가 어려워서 내보내진 직원은 안 어려운가?)
22년 8월. 네이버가 국민연금과 뭘 제휴를 했는지 '가입내역안내서 확인하기'를 해보라고 알림이 왔다. 여기에 또 떡하니 국민연금 20년 3월, 4월 미납이 찍혀있었다. 물론 건보도 여전히 미납.
아니 이게 왜 자꾸 남아있지?
4대 보험은 다 건강보험공단에서 관리를 한다. 국민연금도 마찬가지다. 마치 창구를 일원화한 것 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렇지가 않다.
건강보험료는 납부하지 않으면 바로 재산에 압류를 거는 등의 조치를 취한다. 게다가 직장가입자가 퇴직하면 칼같이 지역가입자로 돌려서 내가 가진 재산에 대해서 보험료를 부과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국민연금은 이렇게 강제추징을 하지 않는다.
왜일까?
연금은 안내면 그만큼 안주면 그만이니까.
못받아서 아쉬운건 수급자지 지급자가 아니므로.
그러므로 연금공단에 물어보면 '건보공단에 물어보세요~' 라는 답변을 하고, 건보공단에 물어보면 '건보는 재산 차압 등의 강제조치를 하는데 연금은 안해요~ 노동부 통하시거나 사법기관에 고발하세요~' 라는 답변을한다.
건보공단에 민원을 넣어서 받은 답변
노동부에 연락을 하면 임금체불이 아니라 보험료 미납은 처리할수 없다고 하고, 사법기관을 통하려면 경찰서에 가서 형사 고소를 해야되는데 경찰은 "그걸 저희한테 왜 신고하시는건지...? 라고 되묻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진짜 몰라서 그러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그럼 민사로 가야하는데 변호사 비용을 내가면서 지지부진한 민사 몇 년 진행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건보료 징수에 혈안인 공단이 여행업이 어려웠다면서 체납된 건보료에 대해서는 느릿느릿 추징을 하고 있는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물론 공단에선 열심히 추징하고 있다고 하겠지만 개인에게도 그런 유도리를 이렇게나 발휘했다면 모를까 지역가입자들의 원성이 자자한 걸로 봐서는 그런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게다가 나라에서는 국민연금 수급권을 보호하겠답시고 '기여금 제도'라는 것을 만들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회사가 떼먹고 안낸 돈을 근로자가 내면 수급기간 '절반'은 인정해줌. 회사가 미납했던 돈 내면 그 돈 다시 돌려줌. 최초 한 달에 대해서는 보험료의 반은 납부한거로 인정해줌' 이다.
이건 119개월납부자에겐 매우 필요한 제도(국민연금은 최소 120개월을 납부해야 받을 수 있다)라고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이미 급여에서 세금을 공제한 근로자가 자기돈으로 또 선납을 하고(이중과세이고, 원래 금액의 반절밖에 인정받지 못한다) 나중에 돌려받으라는 것이다(업주는 안내도 그만).
이 법은 우습게도 횡령자 처벌 보다는 횡령을 당한 사람에게 '연금 받고 싶으면 일단 니 돈으로 니가 먼저 내, 절반은 인정해줄테니까. 걔가 혹시 나중에라도 내면 돈 돌려줄게. 아니면 어쩔 수 없고.....'
이런 법안을 통과시킬 시간에 돈 떼먹은 사람들에게 추징을 빡세게 하는 것이 더 나은 것 아닐까?
정말 힘들어서 못내는 사람 보다는 안낼만 하니까 안내고 있는 사람들도 태반일텐데.
2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남아있는 나의 미납내역이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아 건보공단에 다시 문의를 했다. 그랬더니 작년과 똑같이 '여행업은 여전히 어렵고 이제 좀 살아나는 중이잖아요.' 라고 한다.
그러면서 '해당 업체는 폐업신고도 안했고 법인이라 개인 재산에 압류를 걸 수도 없다. 올해 7월 것만 빼고는 최근 1년 정도는 세금을 미납하지 않았으니 나름 성실하게 세금을 내려고 노력중인 것으로 보인다." 라는 것이다.
내가 미납금을 선지급 할테니 미납 기록을 지울수 없냐 했더니 그것도 안된다고. 회사가 내지 않으면 평생 미납 기록이 그냥 남아있게 된다는 것. 그러면서 나처럼 이 미납 기록이 떠있는게 싫어서 연락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고 한다. 아니 그렇게 사람들이 내가 고의로 체납하지도 않은 미납 기록 남아있는 것이 싫다는데 해결 방법을 왜 안 찾아주는거지?
통화하는 내내 마음이 참 답답했다.
공단이 회사의 대변인도 아닌데 내 나이가 수급나이와 아직 멀고 그 회사가 납부의 의사가 있어 보이니 8년 정도는 더 기다리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공단은 철저한 체납 세금 추징과 징수가 업무인 것 같은데 왜 공단은 그리 하지 않고, 나는 전 회사 체납 세액의 자발적인 납부를 기다려줘야 하는 것일까.
아마 이런 공단의 태도가 업주들이 안일하게 구는 이유일 것이다. 어차피 업주들이 안내고 버텨도 공단에서 알아서 변명을 다 해주니까.
정작 이 상황의 당사자인 근로자는 회사가 이미 떼어가버린 내 세금을 언제까지 내겠다는 약속도, 미납시켜 미안하다는 사과도 받아 본 적이 없다.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이렇게 횡령에 관대했었던가? 그들은 내 돈을 그냥 가져가서 쓰고 2년간 나에게 이자 한 푼 주지 않았는데?
타인의 돈을 아무렇지 않게 자기 주머니에 넣고, 정작 그 돈을 내야 할 곳이었던 나라에 내지 않은 그들에게 묻고싶다.
정말로 낼 의향이 있긴 있냐고.
중구 건보공단은 해당 지역에 워낙 많은 여행사들이 있어 이런 문의가 자주 발생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더욱 더 민원인에게 여행사들의 어려운 상황을 이해하라고 설명하고 있는 듯 하다.
엄연히 말하면 회사가 20, 21년도에 걸쳐 직원 돈을 횡령하고 있는 것인데 왜 업체의 입장을 민원인에게 이해시키는 것인지 의문이 생긴다. 건보와 국민연금은 업주와 근로자가 반반 부담하는데 공단은 왜 회사의 편에 서서 민원인의 이해를 구하는걸까.
민원인 입장에서는 그들이 당장 최근의 세금을 납부하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미 그들 주머니에 들어간 채로 언제 낼 지도 모르는 나의 건보료와 국민연금을 왜 내 세금납부 기록에 미납을 띄우면서 하염없이 기다리게 만드는 것이 짜증날 뿐.
그리고 또 하나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
민원인들이 여행업이 어려웠던 것을 진짜 몰라서 계속 따지고 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이들 민원의 강도는 그 사람들이 근무하는 내내 그 회사가 직원을 어떻게 대했는지와 그 사업주가 국세와 세금 납부를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에 대한 반증이다.
송금수수료도 내기 싫고 통장 기록이 남을까봐 투어피를 인솔자를 통해 외화 반출 한도를 어마어마하게 넘어서는 현찰을 해외로 몰래 실어 나르면서 최대한 세금을 안내려고 최선을 다한 업종이니까.
그리고 여행사들 중에 수많은 곳들이 코로나로 망한게 아니라 원래 오늘내일 하던 곳들이 꽤 많았는데 오히려 코로나 사태 덕을 본 경우도 허다하다. 나라에서 코로나 핑계로 갑자기 지원금도 주고 세금도 무이자로 납부 연장을 해줬으니까. (내가 다녔던 회사는 코로나 전에도 급여가 밀린 적이 있는 곳이다)
그들의 기대할 수 없는 납부 의사에 기대지 말고, 근로자들에게 기여금 서류(떼는데 잡다하고 손많이 가고 시간도 많이 든다)를 요구하지 말고, 기존에 이미 급여에서 추징한 세액이 확인되면 완납으로 처리하고 회사에 구상권을 청구하는 방식으로 처리했으면 한다.
그래야 나의 미납기록이 사라질테니.
또한 이를 위해서는 모든 회사의 급여명세서 발급 의무화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체계가 너무 없거나 애초에 증빙서류를 주고 싶지 않아서 급여명세서 조차 제대로 주지 않는 곳들이 허다하니까. 준다 한들 회사 직인 등이 생략된 간이 서류로 주거나. 차라리 모든 사업장은 홈택스에서 급여 명세서를 발급하도록 제도가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사측의 4대보험 체납은 엄연한 세금 미납과 횡령의 문제이다. 공단은 민원인에게 회사의 입장을 대변하지 말고 최대한의 추징을 바탕으로 회사가 해당 직원들에게 납부 지연에 대한 사과와 납부 약속을 선행하도록 강제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직원들이 넓은 마음으로 회사의 재기를 기다려 볼 의사도 생기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