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제 교사에게 더욱 가혹하던 추운 겨울을 보내며 한 해 또는 그 이상의 기간을 근무할 학교가 결정되어 기쁜마음도 잠시,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게도 2월 말 쯤 되면 심장이 쫄려오기 시작한다.
대한민국 모든 학생, 교사들에게 닥쳐오는 3월 새학기 증후군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
T.S. 앨리엇은 4월이 잔인한 달이라 노래했지만 학교 관계자들 + 학생들에게는 4월이 아닌 3월이 잔인한 달이다. 이들은 삼일절 저녁이 되면 단체로 우울감에 시달린다.
반대로 아이들을 드디어 학교로 보내버릴 수 있게된 학부모님들은 신나는 시기가 아닐까 싶다.
'새학기'라고 하면 긴긴 방학이 끝나고 다시 시작되어 밝고 활기차고 희망에 가득찰 것 같지만 전혀!!!! 아니다.
당사자들은 3월 1일 밤,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라며 잠든다. 아니 잠을 설친다.
특히 신입생과 새학교로 이동해야하는 교사들의 경우는 더욱 더.
올해는 삼일절이 금요일인 바람에 꽉 찬 한주로 시작하는 극악무도한 해였다.
4일 연휴니까 더 좋은 것 아니냐고?
Noooooooooo!!!
어차피 방학에 쉬었고....
어차피 맞을 매라면 그냥 빨리 맞는게 낫다.....
새학기를 꽉 찬 한주로(월요일부터) 시작해버리면 첫번째 주는 지옥 불구덩이 속이다. 학사일정이 월요일부터 빡빡하게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하기 때문에 말 그대로 숨도 못쉬기 때문.
새학기가 수요일이나 목요일 쯤 시작이 되면 첫 주말에 한 숨 고를 수가 있는데 이렇게 월요일부터 쭉 달리면 그 주 주말에는 시체가 된다. 병이나 안나면 다행.. (사실 3월에는 병이 안난다. 너무 긴장해서. 4월부터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
기간제 교사들에게는, 특히나 올 해 새 학교를 구한 경우는 3월이 정말정말 힘들다. 신입생들이 보건실에 문전성시를 이루는 시기도 3월이다.
모든게 낯서니까.
똑같아 보이는 학교지만 정말 희한하게 학교마다 시스템이나 분위기가 다 다르기 때문에 그 분위기를 익히는데도 시간이 상당히 걸린다. 길게는 한 학기를 허니문 기간으로 보기도.
아무리 신학기 준비기간에 미리 나와서 새로 근무할 학교의 상황을 보았다 한들 생판 모르던 학교에 뚝 떨어져서 업무를 시작해야 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없을리 만무하다.
그나마 공립학교의 경우 교사들이 주기적으로 돌기 때문에근무자가 자주바뀌어 그 학교만의 문화가 있기는 힘든데 사립의 경우 교사들이 바뀌지 않고 오래 근무하므로 그 학교만의 문화 등등이 있는 경우가 많아서 더 신경을 써야 한다.
이번에 새로 온 학교는 군대식 문화가 남아있는 학교라고 했고, 규칙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학교이다 보니 개학날 전관방송으로 (기간제교사인데도)신규부임교사 소개가 송출되었고 근무교는 고등학교임에도 불구하고 같은재단 중학교 교무실까지 인사를 다녀왔으며 3월 첫주 중간에 친목을 도모해야한다며 전체 회식까지 했다.(힘들었다ㅠ 이후 부서별 등등의 회식이 진행중...)
이전에는 미션스쿨이라 기독교 정신을 빼면 안된 적도 있었고, 재단 영향으로 학교보단 회사에 가까운 느낌인 학교에 근무한 적도 있었다. 같은 교육청 산하에 있지만 정말이지 닮은 꼴이 없는 학교들이었다.
이러다보니 몇 년 전 만난 기간제 선생님은 사립의 문화가 싫어서 공립학교만 고집하신다고 하셨다. 반대로 공립은 정 없다고 사립의 끈끈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선생님들도 있다. 난 사립 학교에만 있어봐서 비교하기는 좀 어려울 것 같다.
2022년 동아제약 박카스 광고. 니가 선생님인데 학교가기 싫으면 어떡하니!
물론 새로운 학교로의 출근은 설렘도 있다. 하지만 그 설렘을 누르는건 5~80명씩 되는 교직원들의 이름, 업무를 매칭시키는 일이다. 기존 교사들 입장에선 신임 교사는 몇 안되어서 금방 외울 수 있지만 처음보는 몇십명의 얼굴과 이름과 과목을 익히는것은 정말이지 너무 어렵다. 4월인 지금 아직도 이름이 헷갈리는 분이 있고 아직 한 번도 얼굴을 못 본 교사가 있다.
그리고 나는 사서교사이니 도서관에 자주 드나드는 아이들의 얼굴과 이름을 외워야 하는데 왜이리 교복입은 애들은 다 똑같아 보이는건지.... 진심 내가 안면 인식 장애는 아닐까 고민이 된다.
요즘은 특히나 아이들 개인정보 보호 때문에 교복에 이름을 새기지 않아서 더 외우기 어렵다. 그래도 교복 이름표 보면서 애들 얼굴을 매칭시키다보면 좀 빨리 외울 수 있었는데...
업무분장표와 쿨메신저와 그학교 전년도 졸업앨범을 손에 쥐고 열심히 들여다보다보면 어찌저찌 영혼이 가출한 한달 남짓의 시간이 지나고 사람들이 좀 눈에 들어오고 아이들도 구별이 가기 시작한다. 다행이다.
전쟁통같은 신학기가 지나가고 나면 중간고사 기간이 다가온다.
이때쯤 되면 몸이 슬슬 아프다. 초긴장을 하고 있던 몸에서 긴장이 좀 빠져 나가고 새 학교의 공간도 좀 익숙해지고 사람들과도 좀 편안해지다보니 풀어진 몸에 어김없이 잔병이 찾아든다.
한참 환절기이기 때문에 감기나 편도염 한 번은 꼭 앓는다. 아프기 싫어서 고용량 비타민을 때려부었는데도 결국 목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주말에 죽은듯이 누워있어야 한다.
이처럼 숨도 못 쉴정도로 정신없는 새학기인데 올해는 교육청에서 갑자기 학교도서관시스템을 2월에 리뉴얼해서 새학기가 시작하자마자 전국의 모든 학교도서관 업무가 마비되었다. 지금도 매일 뭔가를 고치고 있는 것 같은데 여전히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리고 작년 모든 학교 현장을 혼란의 도가니탕에 빠뜨린 4세대 나이스는 이번 학기 초 급간이나 지역을 이동한 선생님들의 나이스 인증서를 뻑내버리는 오류를 일으키는 바람에 많은 선생님들이 3월 초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덕분에 그냥도 힘든데 유난히 더 힘든 신학기였던 것 같다.
내 경우엔 이 학교가 새로 근무하게 된 학교라서 새 학교에서 잘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경력자이니까 큰 문제는 없지 않겠나 했던 내 입에서 '학교도서관 시스템이 업데이트가 되어서 지금 기능이 원활하지가 않다. 전국 학교가 다 이런 상황이다'라는 변명 아닌 변명을 입에 달고 있어야하는 상황이 달갑지가 않았다. 마치 내가 변명하는 것 처럼 느껴졌으니까. 똑부러지고 프로페셔널한 인상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매번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 확인하고 알려드리겠다'를 앵무새처럼 말해야 했으니 스트레스를 안받을 수가 없었다. 역시 언제나 첫 만남은 계획대로 되지않는다. 그래도 잘 버텼고 잘 살아남아서글을 쓸 심적 여유도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