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당근쥬스 Feb 28. 2024

남들보다 더 추운 겨울

기간제교사의 겨울은 더 춥다

12월 말, 교감선생님의 쪽지가 메신저로 날아든다.

"시간 되실 때 제 자리로 오십시오."


뒤숭숭한 학기말 분위기 속에 누구의 목이 날아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들이 떠돌고 있었고, 내 자리는 정교사의 복직이 예정되어 있어 떠나야 된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기분이 편안하진 않았다.


교무실에 내려가 교감선생님 자리에 가니 예상했던 이야기가 나온다.

"한 해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정교사 선생님 복직이 아니면 계속 계시면 좋은데...."


뻔한 이야기라도 아쉬워해주시니 감사하다 하고 자리로 돌아오는 마음이 썩 즐겁지는 않다.

해마다 벌어지는 일인데도 왜 이렇게 계약만료는 적응이 안되는지.


원래대로라면 2학기 기말고사 즈음 재계약 통보가 이루어진다. 그런데 올해 종로/중구의 학교들의 학급수가 대거 감축된다는 얘기가 있더니 교육청에서 학급수 통보가 늦어지면서 재계약 여부의 결정도 늦어진 듯 했다. 내가 있던 학교는 1학년 2학급이 줄었다. 근처 학교들의 사정도 비슷했다.


통상적으로 한 학급이 줄어들면 교원 2명이 나가야 한다. 지금 학교의 경우 5명의 교원을 내보내라는 통보가 왔단다.


'어느 선생님을 나가라고 했다며?', '올해 결혼해서 내보내는건가?'등등의 이야기들을 뒤로하고 퇴근길에 올랐다.




12월 말부터 1월까지는 대부분 사립 학교의 채용 공고가, 2월 중순부터는 공립 학교의 채용 공고가 난다. 지난해까지는 운이 좋아서 집에서 가까운 학교들이 면접 보자마자 바로 계약이 되었고 덕분에 겨울방학을 마음 편히 보냈으며 출퇴근이 그닥 힘들지 않아서 다행이었는데 올해 공고가 나는 학교들은 거리들이 상당한 것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난다. 아마 거리운은 다 갖다 썼나보다.


구인공고란을 뒤적일때마다 마음이 오락가락 한다. '집에서 한시간 반인데 갈 수 있을까?' '여긴 두시간이 넘네..' '대중교통으로 3번이나 갈아타야 되는거야?!'

이 와중에 학교를 고르고 있는 것을 보니 난 아직 배가 덜 고픈가보다.


거리도 문제지만 지원서 작성이 더 문제다. 학교마다 자기소개서의 양식이 다 다르고, 질문도 다 달라서 학교마다 지원서를 새로 써야 되는 상황. 킬러문항이 하나씩 터져나올 때 마다 창작의 고통에 몸부림치다보면 두어시간은 훌쩍 지나간다. 자율양식 학교들을 만나면 큰 절을 하고싶다.


더 힘든 것은 면접이다. 기간제교사 채용 시 보통 채용 인원의 3배수의 면접자를 부르게 되어있다. (아마 교육청 지침인 것 같다.) 의욕이 넘치는 학교는 5배수를 부르기도 한다. 어떤학교는 절차라면서 기존 기간제샘 계약 연장을 확정해놓고는 공고를 내고 면접자들을 부른다.


보통 1명씩 채용하기 때문에 요즘같은 채용 시즌에는 나머지 사람들이 계속 들러리를 서야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지금까지 면접을 본 학교들의 느낌이 구색을 맞추기 위한 들러리로 나를 부르는 느낌이 자꾸 난달까...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괴로워진다. 내 스펙에 문제가 있나 싶은 자괴감이 들고(나이, 학교 등등에 대한 생각이 자꾸 들 수 밖에 없다. 기간제교사는 나이가 어릴수록 좋다고 한다), 지원서 쓰는 시간+면접 보러 왔다갔다 하는 시간 등등이 너무 많이 든다는 생각이 들고, 언제까지 학교들을 돌아다니면서 이동네 저동네 투어를 해야되는 건지 싶은 생각까지 들기 시작하면 우울감과 함께 자존감이 한없이 땅을 파고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불현듯 십몇년 전 처음 학교에 이력서를 작성하던 때가 떠올랐다. 당시에 진짜 거짓말 안하고 이력서를 백장은 쓴 것 같다. 당시 학교들은 '자필' 이력서 + 정교사 지원의 경우 서류 접수비 3~5만원도 내야 했고, 무조건 방문 접수 or 우편 접수인 곳들도 수두룩 하던 시절이었다.(이메일로 받는 곳은 없었다)


영하 십몇도로 내려가는 추위에 원서 봉투를 들고 우체국에 가서 등기를 부치고, 학교에 찾아가서 행정실에 서류를 내고...  생각해보니 그 땐 어려서 그걸 별 생각 없이 다 했나 싶다. 게다가 접수비까지 내고!(당시 회사는 면접 보러가면 면접비를 주던데 학교는 서류를 접수하는데 접수비를 내라고 했다)


무경력자를 뽑아주는 학교가 없어서 지금은 사라진 불광시외버스터미널에 가서 두시간여 버스를 타고 가는 경기 외곽에 있는 학교 면접을 보기도 했다.


임용시험까 실패 후 회사 생활을 꽤 오래 하다 다시 학교로 돌아온지 4년이 되어간다. 이제 사회경험도 꽤 있고, 돈이 없어 아등바등 일해야 되는 상황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월까지 학교 구하면 되는거지 라고 생각하기에는 구직 활동이 영 쉽지가 않다.  기간제 교사는 2월 말까지 학교를 구하지 못하면 그 해는 쉴 가능성이 높다. 중간에 거의 자리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교과교사들은 기간제라도 과목이랑 때가 잘 맞아주면 몇 년씩 한 학교에 있는 경우가 많다. 지금 있는 학교도 70여명의 교원 중에 반 이상이 기간제 교사고, 그 중 6~7년째 근무중이신 선생님들도 몇 분 계시니까. 하지만 서울지역 사서교사 자리는 거의 휴직 대체 자리라 대부분 1년짜리여서 해마다 '올 한해  학교에서 잘 지내보자' 라는 생각으로 시작하지만 떠날때가 되면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면접장에서 닥치는 상황도 달갑지 않은 경우가 많다. 종교재단 학교에서는 내가 교인이 아닌데 기도를 하라고 했고, 어느 학교에서는 있지도 않은 애는 다 키워놨냐는 질문을 했다. 기간제 선생님들의 카페나 톡방에서는 학교가 기간제 교사를 면접하지만 교사도 학교를 면접보는 것 아니겠냐며 불쾌한 경험이 있는 학교는 공유하고 가지마시라는 이야기들이 종종 나오지만 당장 한 해 자리가 아쉬운 상황에서는 싫은 소리도 감수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내일도 폭설을 뚫고 면접장에 간다. 한군데만 정해지면 24년 한해는 걱정이 없을텐데 이러다 집과 아주 머나먼 곳으로 가야 할까봐 걱정이 된다. 남편이 주말부부는 싫다고 했는데...




다행히 올 해 근무할 학교를 만나 이번주 신학기 준비기간에 새 학교에 다녀왔다. 새로 적응할 것을 생각하면 좀 막막하지만 그래도 올해도 화이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