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여행 상품을 구매해야 할 일이 생겼다. 남편과의 여행 일정이 1월 중순에 맞을 것 같아 겨울방학 중 잠시 어디라도 다녀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어디로 갈까 하던 찰나, 남편이 보라카이를 이야기했다.
'그럼 따뜻한 나라에 가서 좀 쉬다올까?' 하고 보니 보라카이는 들어가는 길이 만만찮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비행기에서 내려서 버스 타고 선착장 가서 배를 타고서야 들어갈 수 있었던 것.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여름 휴가철에 갔던 터라 태풍이 와서 부서질듯한 배에서 죽다 살아났던 기억만 남았던 보라카이 여행.... (이라고 쓰고 난민체험이라 칭하고 싶다.)
이것 저것 알아보기 귀찮으니 세미 패키지나 가지 뭐, 라는 생각에 여행사 홈피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패키지여행사 동남아 상품들은 워낙 다루는 지역이 많다보니 상품이 굉장히 많고 다양하다. 물론 여행사들마다 홈페이지 앞에 출발임박, 마감임박 상품을 띄우기도 하지만 상품 갯수 자체가 많고, 모든 임박 상품을 메인에 노출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라 각 지역 탭에 들어가서 날짜별로 일일이 살펴봐야 한다.
패키지 여행 상품은 여행사에서 랜드사에 요청해 현지 투어피를 결정받고 항공 블럭을 잡아서 상품을 구성해서 팀을 모객해 보내는 경우도 있고, 연합 상품이라고 해서 특별기가 뜨는 구간 등에 여행사들이 모여서 상품을 합동 판매하는 경우도 있다.
연합상품의 경우 항공사에서 신규 취항노선이나 단기간 특별기 투입 노선이 생기면 좌석을 소진하기 위해 한국 팩사들에 '어느 기간과 구간에 특별기가 뜬다'라는 공지를 한다. 이에 맞춰 현지 대표 랜드사 등이 일정을 구성하여 랜드피를 확정한 뒤 한국 패키지사들에 연합상품을 뿌리고 패키지사들은 모객을 한다. 이 상품은 비행편과 일정이 같고 현지에서 다양한 여행사를 통해 모인 사람들이 한 팀이 되어 움직이게 된다.
동남아 패키지의 경우 항공은 손님이 여행사에서 잡아주는대로 각자 타고 오고, 현지에서 연합 행사를 진행하는 형태이다. 이 경우 각 항공사별로 도착시간이 달라 먼저 도착한 사람들은 공항에서 한참 기다려야 되는 단점이 있고, 여행사별 특전이 엄청 차이나는 경우가 있다. 기본적으로는 과일바구니부터 옵션의 포함 여부, 숙소 성급까지 다양하게 달라서 현지 가이드들이 손님들별 특별 사항들을 체크해서 진행한다.
국외여행 신고서 제출일은 다가오고(교사는 학기 말까지 국외여행 신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조바심 속에 수백가지 상품을 뒤적거리다 모 여행사 상품에 예약금을 걸고 여권까지 등록했다. 당연히 해피콜이 올 줄 알았는데 며칠간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다. 내가 예약한 상품이 출발확정인지 궁금하여 대표 전화로 전화를 걸었지만 아주아주 오랫동안 연결음을 들었음에도 연결되지 않았고, 1:1 문의 게시판에 문의를 남기라고 하여 내가 예약한 날짜가 출발 확정이 맞는지 문의를 올려놓았으나 계속 답변 대기중이었다. 이쯤되니 내가 혹시 여행이 확정되어 떠난 뒤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이 여행사가 과연 연락이 될까 싶어졌다.
내가 여행사에 근무할 땐 예약금 제도 자체가 잘 없었고, 일단 예약이 들어오면 아주 늦은 시간의 예약이 아닌 이상 무조건 그날 안에 전화를 걸어서 손님에게 예약 확정을 받았었는데 예약금을 결제까지 했는데 피드백이 없는 것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기다리다가 결국 예약 취소를 요청하고(이건 프로그램에서 자동 처리 되는지 취소 버튼을 누르자마자 환불 처리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다른 여행사에 홈페이지로 예약을 걸고(이곳 홈피에서는 예약금 없이 예약 신청만 받았다) 담당자 번호로 전화를 하니 바로 연결이 되었다. 직원을 통해 출발가능 확인을 하고, 내가 원하는 항공사 발권 가능 여부 등등을 체크하고 전액 완납으로 처리해버렸다.
많은 사이트들에서 상담원 대신 챗봇을 도입하고 있다. AI 시대가 열리기도 했고, 기본 시급이 오르면서 인건비를 줄여야 되기도 하고 이제는 전화도 AI가 대신 받아주기도 하니 당연히 상담 업무도 자동화 수순을 밟아나가는 것이 맞겠다 싶긴 하다. 특히 코로나 시기를 지나면서 많은 업무가자동화되었고, 고객센터를 줄이고 1:1 게시판 운영으로 추세를 바꿔나갔다.
그런데 1:1 문의 게시판은 답변을 기다려야 한다는 단점이 있고, 챗봇이라는건 내가 알고 싶은 것에 대한 대답을 제대로 해주지 않을 뿐더러 계속 도돌이표처럼 똑같은 질문(답변) 리스트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질문은 다양한데 챗봇은 대표적인 몇가지 질문에 대해서만 답을 할 수 있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소비자 입장에서는 '거참 답답하네!'라는 말이 절로 나올 수 밖에 없다. 궁금한 것의 답변을 챗봇으로부터 얻지 못하면 상담원에게 상담을 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나마도 상담원 연결은 없고 게시판에 글을 남기라고 하는 경우가 태반이라 나처럼 성질 급한 사람은 복장터지기 딱 좋다. 이쯤되니 전화까진 아니더라도 사람이 답변해주는 1:1 채팅이라도 운영하는 회사들이 고마울 지경. 제발 사람이랑 이야기하게 해줘요.
내 경험 상 여행사 대표 번호를 통하는 가장 많은 문의는 손님이 가고 싶은 지역의 '출발 확정 날짜'가 있는지(여행사 홈피엔 날짜들이 달력에 다 떠있지만 상품 출발은 최소 출발인원이 채워진 날짜만이 가능하다)였고 두번째로 많은 문의는 상품을 추천해달라는 것이다. 고만고만한 상품들이 많으니 손님 입장에선 뭐가 다른지 일일이 보기 힘들어하기 때문에 여행사 직원들은 모객 집중 날짜 상품이나 특전이 좋은 상품들을 추천해드린다.
여행을 떠나려는 소비자들을 자기 회사 상품 예약으로 유도하기 위해 여행사마다 다양한 상품을 만들고 특전을 넣어가며 홈페이지에 등록해둔다. 그런데 여행 상품의특수성은 물건의 재고만 관리하면 되는 단일 품목의 판매가 아니라는 점이다. 상품의 날짜마다 최소출발인원이 충족되었는지, 고객이 원하는 날짜에 항공 좌석 예약이 원하는 가격에 가능한지, 현지에서 손님을 받아줄 수 있는지, 숙소가 방이 남아 있는지 등등을 복합적으로 고려해야 판매가 가능하다.
이런 패키지 상품의 특성 + 패키지 여행상품의 노출 구조 속에서 출발 확정이 아닌데도 모든 날짜의 예약을 열어두고 예약을 받기 때문에 예약 후 유선상 또는 채팅상의 상담이 필수적으로 진행되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연락 채널을 원활하게 하지 않으면 피드백이 빠른 곳으로의 고객 이탈이 불가피할 수 밖에.
아무리 챗봇의 시대라지만 여러 항목이 묶여 진행되는 여행 상품의 특성상 챗봇으로 처리할 수 있는 부분은 매우 제한적이다. 사이트에 올려놓은 여행 상품 정보로는 대략의 일정, 가격, 일부 출발확정 날짜 정도 밖에 알 수 없다. 티셔츠 한 벌 고르는데는 사이즈와 재질, 가격과 재고여부 정도만 판단하면 되지만 여행은 수많은 것들이 맞아떨어져야 내가 상품을 확정해서 출발할 수 있다. 그래서 챗봇이 아닌 상담 채널이 열려있어야 한다.
어마어마한 광고비를 쏟아부어서 손님이 찾아왔는데 복잡한 상품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손님에게 '우린 이정도 해놨으니 알아서 예약하시라'고 방치하면 그 손님의 여행사에 대한 경험은 불편함 등의 부정적 느낌만 남게 된다. 보라카이 상품 하나에 최소 예닐곱개의 상품이 주루룩 뜨고 날짜별 가격이 다 다른 달력을 마주한 손님들의 마음을 헤아려 따뜻하게 맞이한 여행사와 냉대하던 느낌의 여행사, 이 손님의 다음 여행은 어디를 이용할 것 같은가?
소통 부재와 AI vs 인간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아직 여행업은 사람과의 소통으로 진행되어야 되는 부분들이 많은데 여행사들이 이 부분을 간과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여행사들의 홈페이지 상단마다 고객센터 탭을 만들어 두었지만 한군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게시판으로 연결되거나 챗봇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시대가 빠르게 변하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여행업의 특성상 조금은 더, 사람 냄새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