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쌤, 휴직 대체 쌤이라면서요?

by 당근쥬스

사서교사가 맡게되는 동아리는 고정이다. 도서부.

그리고 많은 학교들이 도서부가 학교 교지 & 소식지 제작도 함께 해야 하기 때문에 교지부 + 도서부로 지칭한다.


그런데 이 도서부라는 것이 고등학교에서는 대부분 상설 동아리(1학년에 가입하면 3학년까지 쭉 진행되는 소위 메이저 동아리. 일반 동아리는 해마다 바꿔서 가입이 가능하다)에 속해있는 경우가 태반이라 중요도로 치면 상급, 부원수로 쳐도 상급인 경우가 많다. 물론 3년간 같은 동아리로 묶이니 교사와 학생들의 관계가 끈끈하다.


동아리 편성 때 인기동아리로 아이들이 몰리면 부원이 2~3명인 곳도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 나는 소수 인원으로 굴러가는 동아리들이 너무 부러웠고, 나에게 서너명의 아이들만 있는 동아리를 배정해주면 아이들과 더 가까이 다정하게 지낼 것이고 아이들이 뭐 사달라고 하면 매번 맛있는 것을 사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서부는 대부분 최소 15명에서 최대 25명까지... (가장 인원이 많았던 경우가 8+8+9 25명이었..) 이 아이들에게 뭐 하나 사줄라 치면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 현실이었고, 도서부는 서너명이 절대 될 수가 없다. 고등학교에서 도서부만큼 생기부 만들기 쉬운 동아리도 없기 때문에 지원자가 많아 면접으로 선발을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올해도 기존 2, 3학년 학생들과 새롭게 뽑은 파릇한 1학년들, 총 20명과 25년을 시작하게 되었고, 대부분의 도서부가 그렇듯이 나름 공부 좀 한다는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그런데 소위 모범생이라는 것들이 늘 동아리 시간 마다 "쌤!! 쫌만 빨리 끝내줘요."를 외치고 "이번주에는 어디 안나가요?"를 외친다. 아이들 데리고 어디 견학이라도 가면 좋을 것 같지만 20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는게 쉽지 않다. 사고라도 나면 내 책임인 것은 당연지사고. 하여 가급적이면 교내에서 동아리 활동을 진행하려 한다.




어제는 2차 동아리날이었다. 간식에 환장하는 애들이니 뭐라도 먹여야지 싶어서 없는 예산을 쪼개서 음료수랑 빵도 준비해서 나눠주고 출석체크를 하고 과제물을 전달하는데 2학년 학생 하나가 연휴 때 작년 도서부 부장(올 2월에 졸업함)이었던 A군을 만났다기에 'A는 잘 지낸다니?' 라고 했더니만 이런 말을 했다.


"쌤, A 형이 그러는데 쌤 육아휴직 대체라서 올해까지만 여기 있는거라면서요?"

순간 한 대 맞은 것 같이 멍하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사회생활 고년차라 난 나름 사회적 내공이 있다고 생각했다. 교실에서 애들이 '사서교사도 교사냐', '교원 자격증 있냐' 이딴 뻘소리를 해댈때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나였다.


그런데 어제 저 멘트에는 머릿속이 하얘지고 말문이 턱 막혀버린 것이었다.

당황해서 뭐라 말했는지도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어떻게 될진 나도 잘 모른다고 했던가...

이런 바보같은 대답이 어디있담.


그래 뭐, 난 기간제 교사니까 정교사가 복직하면 나가는게 맞고, 계약 기간이 올해까지인것도 맞다. 그냥 저 학생의 사실적시적 발언에 긁힌거다. 게다가 작년 도서부 부장인 그녀석이 1년간 나랑 잘 지내놓고는 나가서 애들이랑 저딴 소리나 하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 놀랐다. 애들한테 마음주고 있는건 나뿐이고 애들은 뒤에서 다 내가 기간제니 어쩌니 떠들고 있었구나.


물론 안들리는 데서야 나랏님도 욕한다지만 내 귀에 정확히, 그것도 20명이나 되는 아이들 앞에서 '쌤, 기간제에요?' 라는 이야기를 꽂아넣은 상황이니 멘탈이 부서지는 것도 당연지사.

나보다 더 당황한건 아이들이었다. 애들이 단체로 고장나버린 것.


그러더니 애들이 내 주위에 와서 내 눈치를 살피거나 괜히 가까이 옆에 붙어 앉아있거나 하는 것이었다. 그 애들의 마음을 잘 알겠는데도 저런 멘트를 던지고 태연하게 폰게임이나 하고 있는 녀석이 너무 꼴보기가 싫고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내가 저런 말에 초연하게 대응도 못하는데 교사를 하는게 맞나부터 시작해서 오만가지 현타가 다 왔다. 결국 집에 와서 엉엉 울어버렸다.




난 비록 기간제교사지만 내가 학교에 있는 1년간은 내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아이들을 예뻐하고 좋아한다. 정말 진심을 다한다. 진심은 통하는지 나름 아이들에게 인기도 있고, 날 찾아와서 상담하는 아이들도 많고 '선생님이 좋아요'라는 아이들의 마음도 많이 받고 그게 내 교직 생활의 자부심이기도 하다.


그런데 20명의 아이들 앞에서 정교사의 휴직사유를 명명하며 나에게 올해까지만 있는거냐는 학생의 질문에 버벅거린 내 자신이 너무 싫었다.


밤새 뒤척이다 그 학생의 담임교사와 해당 학년 부장교사에게 상황을 상담했더니 동아리에서 퇴출시키라는 제안을 주셨다. 지금 학기 초라 동아리 변경이 가능하고, 학생의 발언이 너무 부적절한데다가 아이들 앞에서 선생님을 깎아내리거나 공격할 의사가 있었던 것 아니냐며 학생부로 끌고 올 것이 아니면 동아리에서 내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이었다. 그리고 정말 나쁜 의도가 아니었다 한들 본인의 말에 책임을 지게 해야하는게 맞다고.


다만 학생이 제발로 나가겠다고 해야 동아리 변경이 가능하니 학생과 이야기를 해서 내보내라는 것.


그 학생을 마주하기가 싫었지만 일을 해결해야 하기에 해당 학생을 불러서 왜 그런 얘기를 학생들 앞에서 한 것인지 물어보았더니 "선생님이 우리 졸업할 때 까지 같이 있는다고 했는데 아니라고 해서 화가 나고 서운해서 그랬어요. 죄송합니다." 란다.


내가 아이들에게 너희들 졸업할 때까지 같이 있겠다는 이야기를 했던가. 그런 기약없는 얘기를 할 리가 없는데. 지금 3학년 애들한테 말했으면 모를까. 아니 그렇다 한들 그게 어제의 상황을 벌인 이유라니.


나에게 이렇게 큰 상처를 남긴 발언에 대해 넌 어떻게 생각하냐 하니 어제 애들이랑 선생님이 당황하는걸 느꼈다고 한다. 쌤은 그런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학생 앞에서 아이들을 지도할 자신이 없으니 다른 19명을 위해 네가 동아리에서 나가줬으면 좋겠다 했더니 죽은듯이 있을테니 퇴출만은 시키지 말아달란다.


결국 학생이 자필로 사과편지를 써오는 것으로 마무리하기로 했다.




내내 나를 괴롭힌건 바로 이 질문이었다.


내가 기간제교사라는 것이 부끄러워서 스스로 긁힌건가?

내가 기간제교사라는 것이 학생들에게 당당했다면 저런 이야기를 들어도 "그런데?"라고 초연하게 받아쳤을텐데 내 마음 한구석에 기간제교사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어서 학생의 발언에 당황한 것인가?


결국 내 문제였나 싶은 생각으로 괴롭다.

마냥 좋기만 했던 아이들과 교직에 현타도 오고.


정교사나 기간제교사나 똑같은 교원자격증 소지자 아니냐고 이야기하던 내 마음이 알량한 쫀심부리기였나. 그렇다고 내가 기간제교사라 아이들에게 교육활동을 덜 한것도, 못 한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한지 모르겠다. 이제 애들이 내가 기간제교사라는걸 알게 되었으니 날 무시하면 어쩌나 싶은 마음이 스물스물 드는걸 보니 나 자신이 기간제 교사라는 것에 자격지심이 있었나 보다. 애들은 되려 아무생각도 없는 것 같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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