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픽' 이라는 장르를 아는가? 학창시절 HOT와 젝스키스, GOD, 신화 등등 아이돌 그룹의 팬이었던 사람들은 이 장르에 매우 익숙하다. 지금처럼 컴퓨터와 프린터가 흔히 보급되지도 않았던 시기라 한 페이지에 최대한 많은 텍스트를 집어넣기 위해 8포인트의 작은 글씨, 종이 여백은 최소한, 2단, 3단 편집을 불사하던 시절이었다. 출력한 엄청난 두께의 A4 용지를 들고 다니며 돌려가며 짬짬이 몰래 읽던 그 짜릿한 스릴(내용은 말할 것도 없고). HOT에서 시작된 이 장르는 사라지지 않고 현재 BTS의 팬픽까지 만들어 냈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다.
학창시절 나는 클럽 hot였고 자칭 토니부인이었으며 톤혁커플(토니안과 장우혁)의 추종자였다. 교과서 밑에 종이를 깔아두고 몰래 몰래 팬픽을 읽다가 선생님께 걸려서 교무실 앞에서 벌 선 기억이 있다. 선생님들은 팬픽의 대범한 내용에 기함을 했고, 소위 '빠순이'로 소문난 학생들은 매일 가방검사까지 당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응답하라 1997의 성시원 역시 팬픽을 읽다 걸려서 교실에서 된통 혼나지 않았던가?
팬픽의 시작은 PC통신이었다. 전화선을 타고 흐르던 연결음이 이제는 추억이 된 하이텔, 나우누리, 천리안이 만들어 낸 가상공간은 드넓었다. 전국의 각 보이그룹의 팬들은 이곳으로 모여들어 팬클럽을 만들었고 그 커뮤니티 속에서 팬픽은 자라났다. 혹여나 오빠들이 우리를 두고 다른 여그룹의 멤버와 연애라도 할까봐 전전긍긍하던 팬들은 결국 그룹 멤버들끼리 남남 커플로 만들어 버린 것이 팬픽의 탄생 비화다. 하긴 한 보이그룹의 멤버와 열애설이 난 B 여그룹의 멤버는 칼로 찢긴 본인의 사진과 혈서를 받았어야 했던 시절이었으니.
아이돌 팬들의 작문실력이 월등했던 것인지, 여고생/여대생들의 풍푸한 감수성과 창의력이 보이그룹을 만나 시너지 효과를 냈던 것인지 팬픽 시장은 점점 성장해 나갔다. 글 좀 쓴다 하던 팬들은 그룹에 대한 애정을 쏟아부어 멤버들끼리 가상 커플을 만들어내었으니 얼마나 글이 술술 써졌을 것이며, 이를 본 팬들은 우리 오빠들끼리 연애하는 이야기이니 얼마나 작품에 몰입하기 쉬웠을까. 유명한 팬픽 작가들이 등장했고 팬들 속의 작가 팬클럽이 생겼으며 오프라인에서 모여서 동인지를 만들어내다가 결국 99년 '새디(이지련 작)'가 정규 출판본으로 출간되기에 이른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될 부분은 팬픽은 바로 '동성애'소설이라는 것이다.지금도 동성애에 대한 시선이 따가운데 자그마치 20여년 전, 동성애는 더더욱 용납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이 시절 아마도 팬픽은 내 가수에 대한 애정으로 시작되었고 이게 동성애물이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한채 시작되었을 것이다.
팬픽을 쓴 사람들과 독자층이 대부분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니던 파릇한 여고생들, 그리고 여대생들이라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이들이 써내려간 이야기들이 꽤 재미있고 완성도까지 있다는 것에 놀라고그 글 속에 서술된 키스신, 베드신의 수위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점에 더 놀란다.팬픽은 가벼운 로맨스물이나 판타지로 시작했지만 이후 많은 작품들에서 노골적인 표현이 거침없이 등장했다. 고수위 동성애 저작물은 19금으로 분류되지만 당시 pc통신 상에서는 성인인증을 별도로 하는 장치가 없었던 터라 여학생들의 접근은 수월했고 교실과 강의실, 동호회 등을 통해 넓게 퍼져나갔다.
성인이 되어 보이그룹과 절연한 지 꽤 시간이 지난 지금, 인터넷 상에서 새로운 장르를 만났다. 바로 BL이다. BL은 Boy's loves 의 약자로 남성 동성애를 주제로 하고 있는 작품들을 일컫는다. 아마도 이 장르의 시초는 팬픽일 가능성이 높다. 시리즈 어플에서는 BL 표시를 달고 있는 소설들이 메인 화면을 장식하고 얼마 전 재미있게 보고 있던 웹툰에서는 갑자기 남자주인공이 남성 동료에게 고백을 하는 장면이 나왔다. 어쩐지 등장인물들이 모두 남자더라니.
2020년 코로나로 인해 언택트 시대가 열리고 외출을 차단당한 채 집에서 시간을 보내야 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웹툰, 웹소설 시장이 엄청난 성장을 이루고 있다. 전부터 포털에서는 웹툰과 웹소설 시장을 키우려 많은 투자를 했지만 유의미한 성장은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면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팬픽과 BL장르는 소비층이 주로 여성층이다. 업계에서 GL(Girl's Loves) 장르는 아직까지 마이너 장르로 치부하는 것을 보면 소비층에는 그리 요구되지 않는 장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터. 실제로 로맨스 장르의 텍스트 소비층은 여성들이 많고 이들의 선택을 받기 위해 인터넷과 어플리케이션 상에는 많은 BL 웹소설과 웹툰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동성애와 관련된 제한이나 부정적 시선은 많이 사라져가고 있다. 아마 이런 인식 변화에는 방송인 홍석천씨가 큰 기여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나는 전부터 동성애에 대해서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아마 고등학교 시절 팬픽을 접해서 동성애에 대해 '그럴 수도 있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이게 팬픽의 긍정적인 효과였을까. 학창시절 이후 나는 동성애에 대해서 사람은 사람을 서로 사랑하며 사는데 단지 그들은 그 대상이 동성인 것 뿐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세상은 유독 동성애에 있어서는 자극적인 부분과 에이즈를 어필한다. 퀴어축제의 일부 퍼포먼스를 봐도, 얼마 전 이태원 게이클럽 사례를 봐도 내용이 너무 자극적이다. 언론은 퀴어축제의 취지와 내용을 설명하기 전에 자극적인 사진과 내용만 추려서 게시하고 기독 단체들과의 충돌을 더 크게 부각하여 포털 메인 노출을 시도한다. 게이 클럽 내의 비정상적인 성행위를 어필해서 코로나가 문제가 아닌 그들의 비정상적인 행태에 관심을 쏟게 만든다. 미디어들이 동성애와 관련해서는 무조건적으로 자극적인 사진과 내용만 뽑아서 뿌려대는 것일까. 그냥 사람들간의 관계 중 한가지로 인정하고 서술하면 될 문제인데. 이런 방식이라면 달팽이가 기어가는 속도로 인식 개선이 이루어질 것 같다.
프린터 앞에서 장당 30원인지 50원인지 계산하며 팬픽을 출력하던 시대와 달리 이제는 손 안의 인터넷 세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 관련 컨텐츠에 접근하기 쉬워졌고 소비하기도 쉬워졌다. 웹소설과 웹툰 시장의 고속 성장으로 생산되는 관련 컨텐츠의 양 역시 폭발적이다. 이제 발을 내딛은 BL 시장에 내가 너무 큰 기대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 컨텐츠들이 동성애에 대한 인식을 평범한 쪽으로 바꿔 나갈 수 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학창시절 읽은 팬픽의 영향을 받아서 동성애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지 않게 된 것 처럼. 그러려면 BL 작가들이 자신의 글에 대해 조금은 사회적 책임감을 가져야 할텐데 아직까지는 자극적 내용으로 조회수를 높이려는 시도의 작품들이 많이 보이는 것 같아 조금은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