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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끼적대는 끼서 Oct 06. 2021

안녕! 마스트리히트

네덜란드 교환학생 D+1

2017년 1월 19일 목요일


정말 큰 일은 막상 닥쳐오면 실감이 안 나는 법이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출국일까지의 디데이를 매일 체크하면서 얼마나 설레어하고 또 불안해했던가! 비록 6개월간이지만 그래도 낯선 나라에서 나 홀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건, 지금껏 잔잔했던 내 22년 인생에서 유래없는 빅 이벤트가 분명했다. 그런데 정작 오늘 아침 공항으로 향하는 길의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아무렇지가 않았다. 사실 수능 시험날 아침에도 비슷한 기분이었는데, 당장 눈앞에 마구 몰아치는 삶의 흐름에 어리둥절한 채로 그저 휘말려가는 느낌이랄까. 뭔가를 생각할 새도 없이 도착한 공항버스는 나와 부모님을 싣고 밤의 도로를 빠르게 헤엄쳐갔다. 나는 어둑한 차 안에서 캐리어 무게를 조금 걱정하다가 까무룩 잠들어 버렸다.


공항에서 부모님과 생각외로 담담하게 작별인사를 마치고 게이트 앞에서 지은이와 탑승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지은이는 우리학교에서 유일하게 나와 같은 학교에 배정된 동갑내기 친구인데, 교환학생 명단이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은이로부터 연락이 와서 한번 밥을 먹었었다. 그날 이후로는 처음 보는 거였지만 그동안 연락은 꾸준히 해서 그런지 크게 어색하지는 않았다. (지은이도 같은 생각일지는 모르겠지만^^) 무엇보다 앞으로 함께 방을 쓰게 될 룸메이트고, 개강 전에 스페인 여행도 같이 가기로 이미 계획을 다 세워 뒀는걸! 사실 우리는 아직 서로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는데, 어쩌다 이런 중요한 결정을 나답지 않게 충동적으로 내렸는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이게 잘한 결정일지 아닐지는 나중에 가봐야 알겠지만, 일단은 낯선 나라에서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한 명 생겼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벌써 조금 위안이 된다.


비행기 출발 시간이 다가오고, 지은이가 어머니께 마지막으로 전화드리는 것을 보고 나도 따라서 전화해볼까 했지만 내 휴대폰은 이미 정지되어 있었다. 편지라도 쓰고 올 걸 그랬나, 살짝 후회가 들었다.


인천공항에서 새벽에 비행기를 기다리며 찍은 사진. 사실 저때도 별다른 느낌이 없었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냥 잠시 여행 온 기분이랄까.




우리가 탄 KLM 항공은 네덜란드 항공사여서 그런지 네덜란드 사람들이 많이 탄 것 같았다. 네덜란드 사람들의 체격에 대해서는 익히 들은 바가 있지만, 실제로 보니 정말 다들 엄청 길쭉길쭉하고 체격이 좋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비행기 좌석은 참 좁았는데, 몸집이 작은 편인 나에게도 좀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내 오른쪽 자리에 앉으신 (네덜란드인으로 추정되는) 할아버지는 엄청나게 큰 몸을 작은 자리에 구겨넣고 계셨는데, 역시나 불편하셨는지 그나마 여유가 있는 창가쪽으로 몸을 기대고 비행 내내 잠을 설치시는 것 같았다. 



인천에서 네덜란드 스키폴 공항까지, 11시간 비행은 끔찍할 것 같았지만 의외로 견딜 만 했다. 아쉬운 건 기내식에서 치킨과 비프중에서 고르라고 할 때 치킨을 고른 것 뿐! 비프가 비빔밥을 말하는 건 줄 몰랐다. 앞으로 6개월간 비빔밥은 못 먹을텐데 아쉬웠다. 그래도 다행히 치킨 세트도 괜찮았다. 사실 기내식은 그 자체로 뭔가 사람 마음을 설레게 하는 데가 있지 않은가. 


플라스틱 물컵을 빙 둘러서 새겨져 있던 비행기, 나막신, 그리고 자전거. 다른 용기에는 튤립도 그려져 있었다. KLM의 네덜란드 항공사로서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듯한 아기자기한 그림들이 참 귀여웠다.




드디어 네덜란드에 도착했을 때 현지 시각은 새벽 4시 반이었다. 한국에서는 다들 한참 잠에 들었을 시간에 출발했는데 비행기에서 내리니까 딱 이른 새벽이라니, 비행기를 타고 얼마 안 지나 도착한 것만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이곳의 겨울은 한국과 비슷하다. 아주 사알짝 덜 추운 정도? 그래도 입김이 나오고 손이 시려운 건 똑같다. 


스키폴 공항이 위치한 암스테르담에서 내가 앞으로 살게 될 동네 마스트리히트(Maastricht, a가 두개다! 우리말 표기는 마스트리흐트 라고 하는 모양인데, 나는 그냥 여기 사람들 발음이 들리는대로 쓰겠다.)까지는 정말 멀다. 네덜란드 북부에서부터 최남단까지의 경로니까 당연하긴 하지만, 새삼스레 마스(앞으로 마스트리히트를 이렇게 자주 줄여서 부를 예정이다)가 시골 동네라는 것을 실감한다. 우리는 마스트리히트행 기차표를 끊었다.


이곳의 기차는 기차라기보다는 지하철같은 모습인데, 네덜란드 사람들의 체격에 맞춘 것인지 정말 널찍널찍하다. 내 1.5배쯤 되는 거인들이 사는 나라에 온 기분이었다. 또 하나 신기한 것은 티켓 검사를 안 한다는 점이다. 들어갈 때 티켓을 찍는 입구도 가림막 하나 없이 덩그러니 놓여있어서, 만약 누군가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무임승차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개찰구뿐만 아니라 1등석 2등석 구분도 마찬가지. 알아서 자기가 산 티켓에 맞는 자리에 가서 앉으면 된다. 이렇게 사람들의 양심에 온전히 맡겨도 적자나지 않는걸까? 쓸데없이 남의 나라 철도 사업자 걱정을 잠시 해 봤다. 


차창 밖으로 보이던 네덜란드의 하늘. 여기는 서울만큼 고층 건물이 많지 않아서 어디서든 탁 트인 하늘을 볼 수 있다. 무거운 짐을 잠시 잊으니 제법 낭만적인 기차여행 기분을 낼 수 있었다. 피글렛 인형은 앞으로 여행을 다니면서 나 대신 사진에 출연시키려고 챙겨왔다.




기차를 타고 3시간 가까이 걸려서 마스트리히트에 도착했다. 우리는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용케 버스를 잡아 M빌딩*이 위치한 거리, Brouwersweg에 도착했다. 문제는 버스 정류장에서 엠빌딩까지 걸어가는 길이었는데, 무려 6개월치 짐을 넣은 초대형 캐리어는 무겁지 오르막길은 힘겹지... 거기다가 지은이의 캐리어 바퀴는 유럽의 거친 돌길을 이기지 못하고 도중에 망가져버렸다. 우리는 보도블럭을 깔지 않는 미-개한 유럽인들을 한국어로 마음껏 욕하며 오르막길을 올랐다.

*M빌딩 : 우리가 앞으로 살게 될 게스트하우스 이름이다. 마스트리히트 대학은 기숙사를 제공하지 않아서, 학교와 제휴한 게스트하우스나 일반 셰어하우스-flat이라고 부른다-를 학기 시작 전에 학생들이 알아서 구해야 한다.


가까스로 도착한 엠빌딩은 예상보다 훨씬 깔끔했다. 사실 오기 전에는 폐병동을 개조한 곳이라는 말을 듣고 좀 무서웠는데, 그런 사실이 무색하게 무척 밝고 따뜻한 분위기의 건물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여기서는 교환학생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술파티를 벌이는데, 병원 귀신이 있었어도 진작에 퇴마됐을 것 같다^^)

우리가 숙소를 구하면서 가장 걱정한 것은 다름아닌 베드버그(빈대)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유럽여행 과정에서 가장 큰 공포로 꼽는 요소 중 하나다. 내 몸이 물리는 것도 일단 끔찍하지만 베드버그가 짐에 옮겨붙어서 번식하게 되면 최악의 경우 짐을 다 버려야 할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끔찍하게도 사람 몸에 난 털에 서식하기도 한대서 나랑 지은이는 정말 치를 떨었고, 스페인 여행 숙소 역시 후기를 꼼꼼하게 뒤져가며 골랐었다.


어쨌든, 우리가 11월쯤에 미리 계약한 엠빌딩 301호는 다행히 최근 3년간 베드버그가 나온 적이 없는 방이라고 했다. 또, 우리 방은 중문으로 격리된 중간 복도에 위치하고 있어서 엘리베이터 소음도 없고, 샤워실이나 주방같은 공용 공간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역시 출국 전 방을 고르는 데에 많은 시간을 쏟은 보람이 있었다. (지은이와 나는 방을 고를 때 건물 설계도까지 다운받아서 어느 위치가 좋을지 진지하게 토론했다!!)

그나저나 관리자 릴리안은 '303호에서는 안타깝게도 작년에 베드버그가 나왔지만, 방역을 잘 했다'고 명랑하게 말했는데, 우리는 303호에 살게 된 사람이 들었다면 식겁했을 이야기라고 작게 수군댔다.


짐을 대충 풀어서 다소 어수선한 우리 방. 우리는 한국인답게 도착하자마자 바닥부터 박박 닦았다. 이전에 쓰던 놈들은 분명 신발을 신고 다녔을게 뻔하기 때문에!! 엠빌딩의 방은 전부 층고가 엄청 높고 커다란 통창이 있어서 실내여도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든다. 책상쪽 벽지 색이 푸른색이라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창가쪽을 내가, 문 쪽을 지은이가 쓰기로 했다. 옷장도 반반 나누어 쓰기로 해서 반씩 옷을 걸어 두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창 밖으로 보인 풍경이 인상깊어서 바로 휴대폰 카메라를 켰다. 슬슬 날이 밝아오는 하늘이 너무나 아름답다. 우리가 3층인데도 이런 뷰가 나온다는 것은, 주변에 높은 건물들이 정말 없는 편이라는 의미다. 한국에서는 쉽사리 보지 못하는 풍경이어서 우리는 꽤 오랫동안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짐도 얼추 풀었겠다, 식료품을 살 겸, 동네 구경도 할 겸 집을 나섰다. 엠빌딩에서부터 이 동네의 작은 백화점 HEMA에 가는 길은 생각보다 가까웠다. 사실 2년간 광활한 관악의 캠퍼스를 누비며 튼튼해진 우리 다리에게 그정도 거리는 껌이라고 할 수 있다. (실수로 건물이 멀리 떨어진 두 강의를 연달아 신청하는 바람에 한 학기 내내 1km를 15분내에 달려가야 했던 슬픈 기억이 떠오른다...) 도착해서 카트를 끌며 생필품을 이것저것 담다 보니 짐이 생각보다 많아졌다. 여기서 우리의 실수는 장바구니를 들고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는 우리나라처럼 일회용 봉투를 팔지 않아서 사람들은 대부분 천으로 된 장바구니를 들고 온다. 결국 거기서 비싼 가격을 주고 다회용 장바구니 하나를 샀다. 앞으로는 장 볼때 까먹지 말고 들고 나와서 뽕을 뽑아야겠다.


네덜란드 상점이 우리나라와 또 다른 점은 한켠에 쭉 늘어서있는 휴대용 바코드 리더기를 가져가서 셀프로 계산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옆에서 유심히 관찰하다가 그대로 따라하면서 나름 자연스럽게(?) 첫 장을 봤다. 물건을 카트에 담을 때마다 리더기로 찍어서 총액을 바로바로 확인할 수 있고, 마지막에는 셀프 계산대에 가서 점원에게 돈을 내면 끝. 그런데 우리는 딱 봐도 외국인이라 좀 못미더웠는지, 점원이 물건 몇개를 직접 찍어보면서 우리가 보여준 총액과 비교해보는 것 같았다.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이곳의 고기는 정말 싸고 종류가 무척 다양하다. 그리고 치즈 - 나는 살면서 그렇게 다양한 치즈는 처음 봤다 - 는 말도 못하게 많다. 물론 우리는 낯선 치즈들을 잔뜩 경계하면서 일단 익숙한 피자치즈를 샀다. 그리고 초콜릿도!!! 정말 많고 정말 싸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초콜릿을 먹고 있는데, 좀 더 사올걸 후회중이다. 이렇게 먹다 보면 살이 엄청 찌겠지만... 너무 맛있는 걸 어떡하란 말인가.


아참, 앞으로 장보기와 같이 공동으로 나가는 돈은 공금으로 결제하기로 했다. 지은이가 하얀색 리락쿠마 동전지갑을 선뜻 내주어서 거기에다 공금을 보관하기로 했다. 일단 각자 100유로씩이면 되겠지? 싶었는데 장을 한번 보고 나니 생각보다 많이 빠져나가서 당황했다. 앞으로 계획적인 소비를 위해 여행용 가계부 어플을 열심히 적어볼 예정이다. (나는 트라비 포켓이라는 어플을 쓰는데, 꽤 괜찮다!)


우리는 장을 보고 돌아와서 첫 식사를 만들어 먹었다. 비록 만들었다.. 라고 하기엔 좀 엉성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매우 잘 챙겨 먹는다며 자화자찬을 했다. 지은이랑은 생각보다 손발이 잘 맞는 것 같아 다행이다.


오늘의 메뉴
▶ 점심 겸 저녁 :  bbq 치킨 피자, 샐러드, 탄산음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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