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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끼적대는 끼서 Oct 06. 2021

자전거 구하기는 너무 어려워

네덜란드 교환학생 D+2

2017년 1월 20일 금요일


오늘은 그야말로 끔찍하게 피곤한 하루였다.

Walker(걸음 수에 따라 행성을 진화시키는 귀여운 어플이다)를 보니 오늘 무려 2만 걸음을 넘게 걸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원흉은 바로바로 내 망할 자전거다. 아니, 어쩌면 내 키가 문제였을까?


널리 알려져있다시피 네덜란드에서 자전거는 아주 보편적인 이동수단이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데, 어릴 때부터 타서 익숙해진 건지 다들 매우 숙련된 솜씨로 자전거를 타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신기한 건 우리나라같았으면 보조바퀴를 단 자전거나 탈 것 같은 나이의 어린아이들이 바퀴가 큰 두발자전거를 타고 슝슝 잘 달린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건 동시에 자전거 도로에서 조금이라도 버벅대면 죽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곳은 자동차 도로의 가장자리 부분에 페인트를 칠해서 자전거 도로로 정해 두었는데, 아무래도 자전거 도로가 좁다 보니 앞사람이 느리다 싶으면 다들 바로 옆의 자동차 도로로 빠져서 추월해버린다. 이렇듯 자전거 도로와 자동차 도로가 거의 맞붙어있다 보니 자동차들과 섞여서 빠르게 달리는 자전거 운전자들도 쉽게 볼 수 있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자전거 운전의 실체를 보고도 우리가 자전거를 사기로 결심한 것은, 우리도 6개월간 이곳에서 적응해 살아가기 위해서는 한대쯤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엠빌딩에서 마스트리히트 대학 건물까지 걸어서 다니기에는 거리가 조금 있기도 하고 말이다. 한국 같았으면 그냥 버스 타고 통학할래~ 했을텐데, 여기의 대중교통 요금은 한국보다 훨씬 비싸다. 편도에 (현금 기준) 3유로니까, 한국 돈으로 치면 학교 한번 오고갈 때 버스비로만 7800원 정도가 드는 셈이다. 그래서 다들 자전거를 하나씩 장만하는 모양인지, 엠빌딩 자전거 보관소는 엄청 크고 자전거로 가득하다.


마스트리히트 대학 학생들을 비롯해서 여기 지역 사람들은 대부분 페이스북을 이용해 소통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페이스북에는 마스트리히트 중고 자전거 거래 페이지도 있었다. 지은이는 운좋게도 멀리 갈 필요 없이 엠빌딩에 사는 판매자의 글을 찾아서 당장 오늘 아침에 아이보리색 자전거를 장만했다. 문제는 나였다. 길쭉길쭉한 인간들만 사는 이 나라에서 15Xcm 신장에 맞는 자전거를 찾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던 것이다!!! 나는 이러다 개강일(2월 6일이다)까지 자전거를 못 구할까봐 무척 불안해졌고, 내 키에 맞으면서 합리적인 가격의 자전거를 최대한 빨리 구하겠다고 발버둥 친 결과 버스를 타고 약 30분 정도(도보까지 하면 45분 정도) 걸리는 거리를 움직이게 되었다. 지은이는 어차피 지금 딱히 할 것도 없다며 흔쾌히 나와 동행해주었다.




아직 유심칩을 못 사서 데이터를 쓸 수 없기 때문에 구글맵에서 가는 길과 오는 길을 찾아 경로를 미리 캡쳐해 두었다. 판매자 Leo 할아버지에게 '5시까지 가겠다'는 메시지를 보낸 후, 우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씩씩하게 집을 나섰다. 앞으로 우리에게 닥쳐올 시련을 상상도 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버스에서 내려서 지도를 보며 걸어가는 것 까진 쉬웠다. 그런데 지도가 어쩐지 점점 을씨년스러운 골목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게 아닌가. 흡사 슬럼가 같은 분위기의 동네에 도착한 우리는 살짝 겁을 먹었다. 네덜란드에서도 시골인 마스트리히트에서는 동양인을 찾아보기 힘들어서 그런가, 지나가는 주민들은 우리를 빤히 쳐다보기 일쑤였다. 우리는 최대한 빠르게 걸어서 가까스로 Leo 할아버지의 집을 찾아냈다.


다행히 자전거는 내 키에 잘 맞았다. 그나저나 어쩐지 다른 것들이랑 다르게 얘만 바퀴가 작다 싶었는데, 접이식 자전거였다. Leo 할아버지는 locker도 살 거냐고 묻더니 갈색과 분홍색 자전거 자물쇠를 보여주셨다. 내가 망설임 없이 분홍색을 고르자 할아버지는 "역시 그럴 줄 알았지!" 라며 껄껄 웃으셨다. 아무래도 내가 초딩쯤 된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어이없지만 이동네 초딩들은 다들 나보다 크다)


아무튼 내 자전거 구입 미션을 완료했으니 이제 집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됐다. 구글맵 경로에 나왔던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 위치를 확인차 여쭤봤는데, 이럴수가!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그 동네는 버스회사가 철수해서 정류장을 다 없애버렸단다. 어쩐지 동네 분위기가 좀 이상하더라니!!! 


자전거는 무겁고, 데이터도 없고.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또다른 문제는, 네덜란드는 해가 아주, 굉장히, 매우 많이 빨리 진다는 점이다. 이건 정말 중요한 정보다. 네덜란드의 하늘이 예쁜 분홍과 하늘색의 2016 팬톤 컬러로 물들기 시작한 시점에 당신이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돌아가는 방법을 모른다면, 그것은 당신이 곧 큰 위험에 처하게 될 거란 뜻이다. 그 아름답던 하늘이 시커멓게 되는 건 아주 순식간이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의 예쁜 하늘. 이건 동 틀때 모습이지만 해가 질 때도 비슷하게 예쁜 색깔이 된다. 그렇지만 하늘의 핑크는 위험한 핑크다. 우리는 앞으로 이걸 dangerous pink라고 부르기로 했다.




자전거를 샀을 때만 해도 새파랬던 하늘이 불과 몇 분 사이에 새까매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지은이가 마스트리히트 지도를 오프라인 구글맵으로 다운받아놔서, 우리는 집까지 길을 따라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이 동네 자체에서 더이상 버스 운행을 하지 않는다니까 별 수가 없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면 좀더 빨리 갈 수 있겠지만, 내가 산 자전거는 둘이 타기에는 너무 작아서 이 시점에 자전거는 무거운 짐짝일 뿐이었다. 걷고 또 걷다 보니 어제 우리가 공항에서 기차를 타고 내렸던 마스트리히트 역이 보였다. 계속 낯설기만 하던 거리에서 유일하게 눈에 익은 건물이 보이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역에서 엠빌딩까지 가는 버스는 바로 어제 탔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버스를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버스에 타려는 순간, 우리는 승차거부를 당했다. 마스트리히트 역에서 출발하는 버스들은 자전거를 실어주지 않는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우리는 허탈한 표정으로 역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결국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마저 열심히 걸어가는 것. 


결국 우리는 약 3.9km를 추가로 걸어서 (물론 자전거도 여전히 함께 끌고서)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사실 오늘 아침에 이미 밥솥을 사러 모세 포럼(Mosae Forum)까지 갔다가 장 본 것까지 들고 2km를 걸어 돌아왔는데, 밤에는 타지도 못하는 자전거를 끌고 그 두배가 넘는 거리를 헤매다가 돌아온 셈이다. 그 와중에 오는 길에 본 마스 강의 야경은 끝내주게 예뻤다. 아마 빈 손으로 가볍게 걷다가 봤다면 훨씬 예뻤겠지. 나와 지은이는 앞으로 이 길이 등하굣길이 될 서윤씨(무려 강 건너flat을 잡았다는 한국분이다. 이분은 앞으로 자전거를 타고 강을 건너 통학을 하실 예정이다)를 미리 애도했다.


마스트리히트의 밤거리는 낮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낮에는 분명히 평화로운 실버타운인데, 밤이 되면 coffee shop(여기서는 카페가 아니라 대마초를 파는 가게를 지칭한다)들이 하나 둘씩 'OPEN'이라고 쓰인 네온사인을 켠다. 그리고 대마를 피우는 껄렁한 외국인들이 거리에 무리지어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는 동네가 된다.(그 와중에도 자전거를 옆에 끼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낮에는 보행자 중심인 것 같던 차들도 밤이 되면 무법자처럼 거리를 달린다. 거기에 지지않고 버스가 뒤에서 달려오든 말든 자전거를 타고 도로를 누비는 네덜란드 사람들도 참 대단하다. 뜻하지 않게 고생을 하게 됐지만, 그래도 입국한지 이틀만에 네덜란드의 낮과 밤 모습을 모두 구경하게 된 건 나름 인상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내일은 다행히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날이다. 온 몸이 다듬잇방망이로 두들겨 맞은 것마냥 쑤시는데, 내일 일어나면 또 어떨지 정말 두렵다... 지은이는 침대에 푹 잠겨서 벌써 잠들었다. 그나저나 여기도 자전거 도둑이 상상초월로 많다는데, 이렇게 고생해가면서 사온 내 자전거를 훔쳐가는 놈은 정말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고생끝에 장만한 내 자전거. 나중에 타보고 알게된 건데 달리다 보면 중간의 저 접는 부분이 자꾸 풀리는 결함이 있는 물건이었다. 내 55유로!!!!




오늘의 메뉴
▶ 아침: 호밀식빵, 복숭아잼, 베이컨, 계란후라이, 오렌지주스, 그린키위, 오렌지
▶ 점심: 소고기 스테이크, 양념감자, 구운 양파와 토마토, 샐러드, 밥, 오렌지주스, 후식 한라봉
▶ 저녁: 바닐라 초코칩 머핀, 아몬드 우유*

*아몬드 우유는 정말 별로다. 우유에 물을 아주 많이 섞은 맛이랄까? 하필 또 슈가프리라 당도도 0에 가깝다. 다음에는 꼭 다른 브랜드 아몬드 우유를 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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