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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끼적대는 끼서 Oct 13. 2021

석회수에 적응하는 법

네덜란드 교환학생 D+3, 4

2017년 1월 21일 토요일


어제 피곤해서 금방 잠든 덕분인지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출국 전만 해도 시차 적응이 어려울까봐 조금 걱정했었는데,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완벽 적응한 것 같다.

(애초에 첫날부터 밤비행기를 타고 자면서 오다가, 여기 도착하니 딱 아침이었서 바로 적응한 것 같기도...)

방 안에는 바닐라와 마카다미아 향이 은은하게 풍기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첫날 장보러 가서 사온 샴푸와 컨디셔너 냄새였다. 지은이는 무려 새벽 2시에 일어나서 머리를 감고 왔다고 했다. 지은이는 참 부지런하다.

 

사실 우리가 이 샴푸를 사게 된 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유럽 생활의 고충 중 하나로 많은 사람들이 석회수를 꼽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경험담을 보면 피부가 안좋아졌다던가, 머릿결이 엉망이 됐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이 많아서 나 역시 어느정도 각오를 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얼굴이 충격적으로 건조한게 느껴졌다. 인생의 대부분을 지성피부로 살아온 인간으로서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이러다 나도 중성이나 건성피부 되는거 아니야~? 라고 잠시나마 설레봤지만, 내가 가져온 수분크림들은 죄 가벼운 것들 뿐이라는 문제가 뒤늦게 떠올랐다. 젠장.


아무튼 다시 샴푸 얘기로 돌아와서, 첫날 마트에서 샴푸를 고를 때 낯선 제품들 사이에서 익숙한 이름을 하나 발견했다. 슈바르츠코프(schwarzkopf)라고, 예전에 셀프염색 키트에 들어있던 일회용 트리트먼트를 만든 회사였다. 당시에 염색모임에도 그 트리트먼트만 하면 머리가 물미역처럼 찰랑거렸던게 인상적이어서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걸 여기 와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그때 보여준 효과와 같기를 바라면서 여러 종류중에서도 repair&care 라인의 제품을 골랐다. 마침 향도 포근하고 좋았다. 지은이는 내 얘기를 듣더니 자기도 같은 걸 샀다. 그렇게 우리 방에서는 같은 샴푸냄새가 나게 되었다는 이야기.



바로 이 제품이다. 지금 다시보니 마카다미아가 아니라 코코넛 냄새인가보다. (나중에 귀국하고 알게 된 건데, 이 제품은 한국에서는 팔지 않는다ㅠㅠ 계속 쓰고 싶었는데...)





잠시 후 우리는 미적미적 주방으로 향했다. 침대에서 더 뭉개고 있기에는 배가 고파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퀴즈 하나. 어제 남긴 재료들(양파 반쪽, 얇은 베이컨 조금, 그리고 찬밥)을 한번에 처리할 방법은?

순간 머릿속에서 번뜩이는 그저께 산 토마토소스

그렇다. 오늘의 아침 메뉴는 바로 로제 베이컨 리조또와 버섯 수프로 결정됐다.

남은 재료들을 볶은 뒤 (로제 소스로 추정돼서 사온) 리코타 토마토 소스를 뭉텅뭉텅 넣었다. 그 위에 피자치즈까지 얹으니 완벽했다. 여기 베이컨은 다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어제 보니 우리가 사 온 베이컨은 워낙 짜길래 간을 일부러 안 했는데 안하길 잘한듯. 그래도 살짝 심심한 맛이길래 한국인 비장의 무기 허브맛 솔트를 조금 넣으니까 딱 괜찮아졌다.

다만 버섯 수프에 건더기라고는 작은 버섯뿐인게 좀 아쉬웠는데, 고기인줄 알았던 건 덩어리진 가루였다. 스프 박스에는 6접시가 나온다고 되어 있었지만 우리가 가루의 1/3만 넣었는데도 4인분이 나왔다. 하하... 아주 두고두고 먹을 수프인 것 같다.


아침 과일로는 사과와 베리믹스를 먹었다. 여기 사과는 꽤 맛있다. 근데 베리는, 와...! 내 생애 이렇게 맛없는 라즈베리와 블루베리는 처음 먹어본다. 아니 여기가 본고장 아닌가? 아님 원래 베리는 이렇게 맛없는 것인가... 점보(Jumbo, 홈플러스쯤 되는 체인 마트다.)에서 앞으로 베리믹스를 사는 건 지양해야 될 것 같다. 




스페인 여행 계획을 짜는데 결제가 자꾸 안돼서 그만두고 해리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을 보기로 했다.

지은이와 나는 요즘 해리포터 시리즈를 정주행 중인데, 이번학기중에 언젠가 갈 영국 여행에서 해리포터 스튜디오를 100프로 즐기기 위해서는 미리부터 복습을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계획형 인간 둘이 룸메이트가 되면 이렇게 된다)

해리포터 시리즈는 어렸을 때 본게 다라 기억에서 희미했는데, 어른이 돼서 다시 보니까 기분이 또 다르다.

해리는 오늘도 답답했고, 시리우스는 정말 허무하게 죽어 버렸다.


저녁으로는 간단히 감자를 볶았다. 해시브라운도 샀는데, 그걸 조리하려면 기름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다음번에 장 볼 때 기름 꼭 사야지. 

키친 안쪽 찬장에서는 숨겨져있던 여러 양념들을 찾았다. 그리고 어떤 친절한 한국인이 놓고 간걸로 보이는 물품들을 발견했는데, 무려 물엿과 고추가루, 그리고 고체 하이라이스 가루 4인분이다.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잘 쓰겠습니다~


일기를 쓰고 있는 지금은 오후 9시 17분. 여기는 밤이 정말 금방 온다. 가게들이 왜 다들 그렇게 일찍 문닫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내일은 꼭 스페인 여행계획을 다 짜고 숙소랑 교통편 예매를 해야될 것 같다. 여행다니는 건 생각보다 귀찮은 일이다.


오늘의 메뉴
▶아침 : 로제 베이컨 치즈 리조또, 버섯 수프, 사과 반쪽, 베리류(우웩)
▶점심 : 남은 치킨 피자
▶저녁 : bbq 양념감자, 호밀 식빵과 복숭아 잼, 서양배




2017년 1월 22일 일요일


오늘 역시 아무것도 안하고 밖에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굉장히 보람찬 하루다.


어젯밤에 갑자기 웹툰 하나를 정주행하는 바람에 느지막이 일어나서 슬렁슬렁 아침을 먹었다. 어제 먹고 남은 토마토소스를 아주 싹싹 긁어서 베이컨치즈파스타를 만들었다. 피자치즈는 정말 사랑이다.

애증의 아몬드우유도 오늘 드디어 끝이 났다. 증오의 베리믹스도!


그리고선 아주 미뤄두었던 스페인 여행 계획 및 숙소 예약을 진행했다. 스투비 플래너를 사용해봤는데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그냥 공유하는 데에만 의의가 있는 프로그램인듯...


여행 계획을 마치고 정신을 차려 보니 점심 먹을 시간이 지나 있었다. 간단하게 식빵에 누텔라를 발라 먹었다. 누텔라 만든 사람한테는 노벨상을 줘야 한다. 당 떨어질 때를 위해서 앞으로는 장 볼 때 과자랑 초콜릿을 뭉텅 사와야 될 것 같다. 간식 없이 4일을 버틴것도 솔직히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주방에서 우적우적 식빵을 먹으면서 석회수 끓이기를 해 봤는데, 의외로 석회가 침전되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는 펄펄 뛰면서 생수를 사먹으라고 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석회수를 먹는 것은 굉장히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저렴한 생수를 사재기 해 와야겠다.


그나저나 이제 사람들이 하나둘씩 입주해 오는 것 같다. 오늘 저녁을 만드는데 키친에 사람이 복작복작해서 굉장히 낯설었다. 안돼 여기서 이러지 마... 여기는 우리만의 한적한 주방이라구!!


저녁으로는 연어 스테이크를 시도해봤는데, 우리는 오늘도 기름이 없으므로 버터를 대신 썼다. 연어 자체에 워낙 기름이 많아서 버터로도 커버가 된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기름만 못했는지 연어 껍데기는 홀랑 타버렸고 후라이팬에 그대로 눌러붙었다. 부들부들...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스테이크가 적당히 구워지기를 기다렸다. 타이밍을 잘 맞춘건지 모 블로그에서 읽은대로 '겉바속촉' - 겉은 바삭, 속은 촉촉 - 한 연어 스테이크를 만들 수 있었다. 먹으면서 우리는 행복에 빠졌다. 또다시 직접 만들어 먹는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커졌달까!


요즘 아주 만들어 먹는 재미에 빠진 것 같다. 물론 지은이와 아무말 대단치를 하면서 만들어서 더 재미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한국어를 아는 서양인이 별로 없다는 건 굉장한 메리트이다. 우리는 다른 외국인들이 영어로 하는 대화를 이해할 수 있지만 그들은 우리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건 무척 재미있는데, 마치 암호로 대화를 하고 있는 기분이다. 


점심에 먹은 베이컨치즈토마토스파게티와 저녁에 먹은 연어스테이크. 나름 가니쉬도 야무지게 곁들여 먹고 있다.


오늘의 메뉴
▶아침 : 베이컨과 양파를 넣은 로제파스타, 호밀식빵, 복숭아잼, 아몬드우유, 샐러드, 베리믹스
▶점심 겸 간식 : 호밀식빵, 누텔라
▶저녁 : 연어스테이크, 밥, bbq양념감자, 양파볶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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