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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끼적대는 끼서 Nov 10. 2021

화재경보와 Pub Crawl

네덜란드 교환학생 D+15 : Pub Crawl

2017년 2월 2일 목요일


평화롭던 M빌딩에 난데없이 요란한 사이렌소리가 울렸다. 화재경보였다.

어제 시장에서 사온 구운 닭을 가니쉬와 함께 오븐에 데워 온 찰나였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하지만 지은이와 나는 "그냥 후라이팬에서 뚜껑 덮고 데우는게 더 맛있을 뻔했다" 따위의 이야기를 나누며 한가롭게 식사를 계속했다. 21년 평생을 한국에서 살아온 우리로서는 늘 그랬듯이 잘못 울린 경보일 게 뻔하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잠시 후 복도는 부산스러운 소음과 웅성거림으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치킨을 우물거리며 리빙룸 문간으로 다가간 우리 눈에 들어온 것은, 재난 교육을 잘 받은듯한 서양 아이들이 빠르게 자기 방에서 중요한 물건을 챙겨 뛰쳐나가기 시작하는 모습이었다. 어떤 여자애는 방 문이 활짝 열려있든 말든 허겁지겁 노트북을 가방에 쑤셔넣고 있었다.

재미있는 건, 나와 지은이를 포함한 아시아계 아이들은 태연하게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키친에서도 다들 아랑곳않고 요리를 계속하는 모습이 너무 웃겼다. 이런 안전불감증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구만!

우리가 먹고 있던 구운 치킨. 깐부치킨st였는데 나름 만족스러웠다.


어쨌든 다들 나가는 분위기라 포크를 내려놓고 핸드폰만 챙겨서 슬렁슬렁 비상계단으로 향했는데, 우리는 우리 층 복도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줄 오늘 처음 알았다. 다들 평소에는 방에 콕 박혀있어서 몰랐나보다. (더군다나 우리 방을 포함해서 4개 방을 제외하고는 전부 1인실이라서, 아직 서로 친해질 일이 없는 지금으로서는 다들 개인플레이를 해서 그런 것 같다.)


남들이 보기엔 우리가 굉장히 느긋하게 대피하는 것 같아 보였겠지만, 사실 우리의 마음은 타들어가고 있었다. 진짜 화재일까봐 걱정돼서가 아니라, 화재 경보기를 울린 주범이 바로 우리일수도 있기 때문이라는게 뒤늦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ㅎㅎ...ㅎ....

사실 여기 온 이후로 오븐은 처음 써보는거라 아까 좀 헤멨는데, 혹시 우리가 끈줄 알았던 오븐이 계속 켜져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 것이다. 다행히 우리가 한국어로 소근거리는 것을 다른나라 인간들은 못 알아들었겠지만, 혹시 한국이었으면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렇게 속으로 진땀을 빼며 계단을 내려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행히 우리 때문이 아니었다. 당연하지! 우리는 오븐 불 꺼졌는지 확인하고 나왔다구! 하지만 사람이 긴장하면 그런것도 까먹기 마련이다. 마치 외출 후 문득 가스불을 껐는지 기억이 안 나 불안해지는 것처럼)


웅성거리는 학생들 무리에 섞여 일층까지 내려가니, 직원들이 우리를 안심시키며 다시 올라가도 된다고 했다. 역시 한국인의 감은 틀리지 않았다. 이건 잘못 울린 경보였던 것이다!

이 와중에 (우리가 파악하고 있는 몇 안되는 우리층 주민 중 하나. 키가 190cm쯤 되어 보이는, 스페인에서 온 친구다.)은 이 상황이 재미있는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올라가는 현장을 동영상으로 찍으며 히히히 웃어대고 있었다. 으휴, 쟤는 몸만 컸지 하는 짓은 영락없는 초중딩이다.


폴은 수염을 아주 많이 기르고 있는데, 사실 동양권에서 오지 않은 남자애들은 전부 이렇게 수염 투성이라 나이를 좀체 알 수가 없다.




잠깐 소란이 조금 있었지만 어쨌든 우리는 저녁을 맛있게 먹고 Pub Crawl에 갈 채비를 했다.

Pub Crawl은 보다 본격적인 신입생 환영 행사중 하나로, 학생들이 약 20명 정도씩 나뉘어 조를 짠 뒤 조별로 마스트리히트 시내의 펍 5~6군데를 돌며 술을 한 잔씩 마시면서 노는 행사다. 드디어 다른 학생들과 제대로 만나는 자리인 만큼, 나는 만만해보이지 않기 위해 나름 빡센 화장을 해 보았다. 가뜩이나 키도 작고 어려 보이는 얼굴인데, 이목구비가 뚜렷한 서양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나는 기껏해야 중고딩정도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양 친구들은 더 빡세게 화장을 하고 왔기 때문에 그런 내 노력은 무산되었다. 그래, 그래도 행사인데 설마 펍에서 신분증 보여달라 하지는 않겠지... 또르르


Arrival Week 행사중에 펍크럴이 제일 재미있다고 전해들었기에 사실 나는 기대를 많이 품고 나갔다. 드디어 제대로 된 교환학생 문화를 체험해 보겠구나!

깜깜한 밤이 되자 마스트리히트 시청 앞 광장에 마스 대학 학생들이 우글우글 모였다. 학생회(?) 멤버로 추정되는 학생들이 우리를 조별로 나누어주었고, 나는 우리 조의 유일한 한국인이자, 3명의 동양인 중 한명이었다. 행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우리는 같은 조 학생들끼리 둥그렇게 원을 만들어서 잡담을 했는데, 나는 마침 내 옆에 서있던 홍콩 친구 Fion, Tang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Tang이 나에게 건넨 첫마디는 이거였다.

"너 한국인이지?"


어떻게 알았냐고 하니 화장법이 딱 한국사람들 화장법이라나. 사실 나도 왠지 그들이 중화권에서 왔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던 참이었다. 역시 서양인들은 아시아인을 구별 못하더라도, 아시아인들끼리는 서로를 구별하는 법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 기준에서도 동안이었는지, Tang은 내가 18살쯤 되어 보인다고 말했다.(물론 아직 만으로는 20살이니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다...) Fion과 Tang은 같이 홍콩에서 와서 그런지 이미 서로 좀 친해진 상태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같은 나라에서 온 애들끼리는 자기들 나라 말로 대화하고 있기도 했다. 나도 한국인 친구가 우리 조에 한명이라도 함께 왔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향형 인간 살려~!


잠시 후 우리 조 인원이 다 모이자 조장인 독일 출신 Klara가 서로 한마디씩 자기소개를 하고 출발하자 했다. 단, 이때 무조건 자신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 한가지를 함께 제시해야 한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뭘 얘기하지 고민하던 찰나, 내 건너편에서부터 자기소개가 시작되었고, 나는 그들이 말하는 내용을 하나하나 들으며 점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안녕 나는 캘리포니아에서 온 제니퍼고, 나는 18살때 우리반 애들 앞에서 알몸으로 뛰어다닌 적이 있어! (까르르 웃는다)"

"(숨넘어갈듯이 웃으며) 와 방금 그거 정~~말 웃기다! 나는 캐나다에서 온 헬렌이라고 해. 나는 남자친구를 동시에 5명까지 사귀어 본 적이 있어!"

"하하하, 너네 정말 대단한데? 나는 독일에서 온 막스고, 나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은 내가 어릴 때 게에게 거시기를 물린 적이 있다는 거야!"

(여기 나온 이름은 모두 가명이다. 나름의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뭐 이런 대화가 빠른 속도로 터져나오는데, 흥미로운 사실이래봤자 기껏해야 '나는 어릴 때 그네를 타다가 날아가버린 적이 있어' 따위를 생각했던 나로서는 충격의 연속일수밖에 없었다.(더 컬쳐쇼크인 내용들도 있는데 자체 필터링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저런 이야기를 이렇게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이었다.

그러나 우리 조 인간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너도나도 수위가 높은 이야기들을 털어놓고 있었고, 나의 차례는 무섭게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내 인생에는 그들만큼 자극적인 에피소드가 없었다. (그리고 아마 있어도 말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나는 시시한 사실을 하나 털어서 내 차례를 빨리 넘겨버렸고, 대체 한국 밖에서는 청소년들이 무슨 일을 겪으면서 사는건지 깊은 의문을 갖게 되었다.




시작부터 범상치 않았던 펍크럴은 이후부터는 그냥 새 펍에 들어가서, 술을 한잔 마시고, 대화를 조금 하다 옮기고의 반복이었다. 말똥말똥한 채로 옮겨다니던 나는 '이렇게 찔끔찔끔 마시는데 왜 다들 만취한 것처럼 신났지?' 싶어서 의아했는데, 나중에 알게 된 건데 여기서는 다들 파티에 가기 전에 pre-drink를 한다. 즉 파티에 가서 술을 먹는 게 아니라, 미리 술을 먹고 어느정도 취한 채로 파티에 가는 것이다. 당연히 우리 조 인간들도 대부분 이미 몇잔 걸치고 온 거였고, 펍을 돌면서 짬짬이 깨지 않게 알콜을 보충하는 중인 셈이었다. 어쩐지 다들 자기소개때부터 이상할 정도로 들떠있더라니...!


결국 나는 중간에 펍에서 내 돈을 주고 추가로 샷 세 잔을 사마셨고, 이후 그들과 비슷하게 흐물거리는 상태가 되어 애프터파티까지 가서 정신없이 놀았다. 기억이 드문드문 남아있지만, 어쨌든 초반 펍크럴이 정말 노잼이었다는 것만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다시는 취한 인간들 사이에서 혼자 제정신으로 있지 않으리...

어쨌거나 마지막에 가서는 제정신이 아니긴 했지만, 나는 현교 덕분에 무사히 집까지 돌아올 수 있었다. 같은 빌딩에 사는 친구들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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