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엽고 하찮음을 곁들인
거 참, 귀엽고, 포동하고 하찮다. 지나다닐 때마다 눈에 밟혔다. 잠옷의 맛을 알아버린 후로는 잠옷코너를 그냥 지나치기가 어렵다. 일상복보다 더 많이 기웃거린다. 평소에 입고 다니는 옷을 산 지는 꽤 되었는데 잠옷에서는 시선을 떼기가 어렵다. 계속 관심이 간다. 유독 눈에 들어온 한 녀석이 있다. 캐릭터가 무심한 듯 귀엽고, 배경이 검은색이라 부담 없이 입을 수 있을 것 같다. 집에 쌓여있는 입지 않은 옷들을 생각하며 지나쳤다.
여기에 왜 또 왔지? 지나가는 길목에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지나치려다 들어와 버렸다. 왜 잠옷코너가 가장 바깥에 있어서 이렇게 눈에 띄게 만들어둔 건지. 이제는 가격도 외워버렸다. 이제 겨울도 거의 지나갔으니 입을 일이 거의 없을 텐데. 계속 눈에 밟힌다. 그런데도 구매를 주저하는 이유는 지금 이 순간만 지나면 기억 속에서 싹 사라지기 때문이다. 하, 정말 귀엽다. 자세히 보니 옷마다 패턴의 위치가 조금씩 다르다. 같은 원단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마냥 일정한 패턴이 아닌지라 캐릭터의 위치에 차이가 있나 보다. 이것저것 둘러보다 가장 마음에 드는 패턴을 발견했다. 이것 참 귀엽구만. 집에 있는 여러 잠옷을 떠올리며 매장을 빠져나왔다.
매장만 나오면 완벽히 잊는다. 지나고 나서도 계속 생각이 나면 살 텐데. 딱 그 매장에 들어선 순간, 잠옷을 본 순간만 아니면 완벽히 잊는다. 있는 잠옷이 충분한 탓일 테다. 굳이 그 무심한 듯 귀엽고 하찮은 캐릭터가 그려진 잠옷이 없어도 나는 집순이 생활을 하는데에 아무런 부족함이 없다.
또 마주쳤다. 하, 왜 여기에 위치해 있어서 지나다닐 때마다 눈에 띄는 거냐며 자연스럽게 캐릭터 잠옷을 찾았다. 이런, 날이 풀리면서 잠옷도 바뀌어버렸다. 부들부들한 느낌의 수면잠옷이 사라지고 봄가을용으로 재질이 바뀌어버렸다. 부담 없는 색에서 아주 부담스러운 하얀색으로 바뀌었고, 재질도 바뀌어서 너무 얇아졌다. 보다가 안 보니까 보고 싶네. 뒤를 돌아보니 겨울제품은 할인행사를 하고 있었다. 설마? 매대에 걸린 제품을 확인해 보니 그 캐릭터는 없었다. 별의별 캐릭터들은 있는데 딱 그 캐릭터만 없었다. 귀엽고 무심하고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그 캐릭터만 없었다. 내 눈에 마음에 드는 건 남들도 똑같은가 보다.
그대로 돌아서서 가던 길 가려는데 뒤쪽에서 익숙한 색깔이 비쳤다. 설마? 지금까지 몇 번이나 지나쳤던 그 캐릭터가 다른 상품 뒤에 숨어있었다. 배치가 달라지면서 이 제품, 저 제품이랑 섞였나 보다. 그래. 이렇게 반가운 마음이 든다는 건 사야 한다는 신호다. 사야겠다. 그런데 사이즈가 한 사이즈 작았다. 매대를 모두 확인해 봤는데도 이 디자인은 딱 하나 남아있었다. 할인도 하고, 살 마음도 들었는데 사이즈가 작다.
집순이로써 홈웨어는 아주 중요하다. 여기에는 몇 가지 조건이 붙는다. 첫 번째, 입으면 집에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옷이다. 대표적으로 잠옷이다. 입는 것만으로 집에 있다는 느낌이 팍 온다. 일상생활을 하는 옷과는 확실히 구분이 되어야 한다. 두 번째, 편해야 한다. 어떤 스트레칭 동작을 해도 편해야 한다. 대표적으로 다리를 위아래로 양옆으로 찢어도 전혀 부담이 없어야 한다. 입는 과정, 벗는 과정 모두 편해야 하며 착용하고 있는 동안에도 편안해야 한다. 살과 닿는 모든 면이 부드럽고 부담스럽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 마지막 하나 남은 잠옷은 사이즈가 작다.
괜히 하나 남았다고 하니까 놓치기가 싫었다. 어떻게 안되나? 잠옷이니까 신축성이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집에서 입는 옷을 일부러 사이즈를 좀 크게 입는 편이기도 했다. 이번에 딱 맞는 사이즈의 옷을 입어봐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데 샀는데 불편하면 어떡하지? 만약 입었는데 조금이라도 불편하다면 그냥 예쁜 쓰레기가 된다. 그럴 순 없다. 옆에 있는 샘플용 잠옷이 눈에 띄었다. 잠옷 샘플, 입어봐도 되나?
피팅룸에서 잠옷을 보이며 입어봐도 되는지 물었다. 6번 방으로 들어가라고 안내했다. 잠옷도 되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잠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잠옷을 입었다. 입는 과정에서는 어떠한 불편함도 없었다. 쭈그려 앉았다가 일어서봐도 괜찮았다. 오? 알고 보니 이 사이즈가 잘 맞았던 게 아닐까. 고민할 것도 없이 그대로 피팅룸을 나와 바로 잠옷을 결제했다. 오랜 기간의 썸을 끝내고 드디어 내 것이 되었다. 기분이 필요이상으로 좋은 것을 보니, 나 이 잠옷 꽤 좋아했네?
그대로 집으로 와 한쪽에 두고 그대로 잠옷의 존재를 잊었다. 매장에서만 좋아하는 매직이 안 풀린 걸까? 막상 보니 참 좋은데 안 보니 그대로 잊고 있었다. 역시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건가. 그래도 추위가 가시기 전에 개시는 해야 한다며 목욕재계를 했다. 새로운 잠옷과의 첫 만남인데 밉보일 필요는 없으니까.
오랜만에 느끼는 새 옷 느낌이 좋았다. 새 옷 특유의 보드라운 털의 감촉, 멍하니 있는 듯한 캐릭터의 오묘한 표정, 어떤 음식이 앞에 있어도 부담스럽지 않은 어두운 배경색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래, 이 맛에 잠옷 입는 거지. 여기저기를 쓰담쓰담하며 보들보들한 감촉을 즐겼다. 그리고 바지에 있는 어마어마한 구멍을 발견해 버렸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는, 외면하고 싶어도 외면하기가 힘든 사이즈였다. 이거 방금 뜯은 건데? 어떡하지?
하, 진짜 어떡하냐. 매장에서 딱 하나 남은 거였는데 교환이 될까? 포장지도 뜯었는데 괜찮나? 아니, 그런데 포장지를 뜯어야 옷의 상태를 확인하지. 옷이 망가진 것을 알려면 포장지를 뜯는 방법밖에 없지 않나? 오픈하는 과정을 영상으로 촬영했어야 하나? 내가 옷을 뜯은 게 아니라 정말 구멍이 난 상태인 건데. 영수증은 안 버렸겠지? 산지 좀 되었는데 괜찮나? 포근하고 조용하던 머릿속이 시끄러워졌다. 거기까지 가야 하는 걸까. 그냥 귀찮은데 아무것도 하지 말까. 하지만 이 구멍은 도저히 용납이 되질 않았다. 이건 아니야.
아쉽게도 집에서 매장은 멀고, 영업시간도 끝났다. 무엇이 되었건 간에 내일로 미루어야 했다. 어쩔 수 없다. 조금 찜찜한 기분으로 잠들면 나만 손해니까 최대한 잊기로 한다. 그래도 여전히 캐릭터는 귀엽고, 포동하고 하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