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득, 아이들에게 이런저런 부탁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손님이 온다며 식탁을 정리하라 하고, 밥 먹은 그릇은 치워 달라 하고, 작은 심부름 하나마저 내 손이 아닌 아이들의 손으로 처리되길 바라며 말이다. 예전에는 이런 일쯤 혼자 척척 해내던 나였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왜 이렇게 됐을까?
아이들이 싫은 기색 없이 부탁을 들어줄 때도 있다. 그럴 땐 묘한 안도감과 함께 뿌듯함마저 느껴진다. ‘아, 내가 잘 키웠구나’ 싶은 자부심도 든다. 하지만 한 번쯤은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본다. ‘이 부탁은 정말 필요한 걸까? 이 작은 일이 그들에게는 얼마나 큰 부담이 될 수 있을까?’ 내게는 사소한 일이지만, 그들에게는 또 하나의 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한때 나도 아이들처럼 바빴다. 아니, 어쩌면 지금보다 더 바빴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을 키우고, 생계를 꾸리고, 그러면서도 나만의 삶을 꾸리느라 하루가 모자랄 만큼 치열하게 살았다. 그 시절의 나는 누구의 도움도 바라지 않았다.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믿었고,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이제는 달라졌다. 나에게 시간은 넘치고, 할 일은 줄었다. 그 여유 속에서 나는 아이들에게 조금 기대어 보고 싶어 졌던 것 같다. 하지만 아이들도 나처럼 각자의 삶에서 치열하게 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내가 한가하다고 해서 그들 역시 한가할 거라는 착각은 어쩌면 나의 오만이다.
부탁이란 것이 그렇다. 때로는 관계를 잇는 끈이 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 끈을 무겁게 만드는 짐이 되기도 한다. 부탁을 받는 사람이 처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책임을 전가하는 일이 되고 만다.
어른다움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나의 여유를 그들의 바쁨에 강요하지 않는 것, 그들의 삶을 존중하며 기다리는 일이 아닐까 싶다. 더 나아가, 내가 아이들에게 의지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성장을 기꺼이 지켜봐 주는 것. 그 속에서 스스로 살아갈 힘을 키우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오늘도 생각한다. 내가 한가하다고 해서 그들이 한가할 거라는 착각은 이제 멈춰야 하지 않을까? 그들의 시간은 나와 달리 바쁘게 흐르고 있다. 나의 여유를 핑계로 그들의 시간을 요구하지 않으려면, 스스로 신중해져야 한다. 부탁은 그들의 시간을 빼앗는 일이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며 관계를 이어가는 방법이어야 한다.
내가 어른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삶을 침범하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어른다움이 아닐까. 나는 오늘도 그 질문을 품고, 다시 아이들에게 말 건넬 기회를 곱씹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