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읽다 보면 알랭 드 보통이 지금껏 사랑에 대해 깊게 통찰해왔고, 그로 하여금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두 남녀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에 관한 우리가 몰랐던 사실과 알아도 간과했던 사실, 그리고 이면의 가능성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때문에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때론 고개를 끄덕이고 혹은 물음표를 던질 수 있는 책이다.
낭만적 서사시의 서막
낭만적 서사시의 서막은 두 남녀가 ‘운명처럼’ 사랑에 빠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클로이와 ‘나’는 런던행 비행기에서 옆자리에 앉은 인연으로 가까워지고, 그 후에도 연락이 닿아 런던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다. 소개팅처럼 인위성이 개입되지 않은, 순전히 우연한 만남이었기에 둘은 이를 ‘운명’으로 여긴다.
그러나 ‘사랑할 운명’과 ‘그 사람을 사랑할 운명’은 별개이다. 사실 ‘내가 65억 인구 중에서도 하필이면 당신을 만날 확률’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대로라면, 비슷한 시점에 비슷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률을 따지고 드는 것은 상대방과 내가 필연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게 만들기 위함이다. 다른 사람을 만날 가능성은 열려있었는데 굳이 당신을 선택한 이유에 정당성을 부여해야 심리적으로 만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심리학에서 ‘인지부조화’라 부른다.
인지부조화란 태도와 실제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부조화가 발생했을 때 그 괴리를 없애기 위해 행동과 일치하도록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즉 “세상에 남자(혹은 여자)는 많아!” 라는 태도를 보이던 사람이 단 한 사람을 선택한다면, “내가 이 사람을 만난 것은 운명이었어!” 라고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감정의 산물인 사랑에도 이성적 사고인 인지부조화가 개입된다니 놀랍지 않은가.
콩깍지
‘나’는 연애 초반에 “아름다움이 사랑을 낳을까, 사랑이 아름다움을 낳을까?”라는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사랑이 아름다움을 낳는다는 말인즉, 눈에 콩깍지가 쓰여서 상대방을 ‘이상화’한다는 의미이다. 때문에 자신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한 면모가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 저자가 끝과 시작은 같고,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왜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와 같다고 했다. 플라톤이 현실과 이데아를 구분했듯, 내가 사랑하는 것이 그 사람의 실체인지 아니면 허상인지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 사람의 어떤 면모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해서 그 사람의 그 면모조차(마음에 들지 않는 면모라 할지라도!) 보듬어줄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자기(honey)’보다 ‘자기(自己)’
한참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불안해한다. 나의 노력으로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무엇을 했기에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가? 라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상대가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 나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상대의 사랑이 식은 것도 나의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때문에 사랑은 노력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결국 식어버릴 사랑이었다면 애써 붙잡지 않아도 아쉬울 것 없다.
다만 우리가 노력해야 할 것은 ‘자기(honey)’가 떠난 후의 ‘자기(自己)’를 지키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가 찾아오기 전의 ‘자기(自己)’를 기억해야 한다. 연애를 하기 이전의 나는 연인과 함께 하는 것들을 혼자서도 곧잘 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함께 하는 일상이 익숙해진 탓에, 이제 연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아이 느껴질 뿐이다.
그러니 행여 연인이 내 곁에서 멀어진다 해도 혼자 다시 그 공간을 메우는 데 오래 걸리지 않는 것, 이것이 우리가 사랑의 종말이라는 비극적 필연에 올바르게 대처하는 방법이다. 상호 보완은 좋지만 상호 의존은 경계할 것. 혼자 잘 노는 사람이 연애도 잘 한다.
사랑과 도덕
이별을 통보하는 사람은 ‘나쁜 놈’ 혹은 ‘나쁜 년’이 된다. 그래서 사랑을 끝내는 사람은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상대를 치켜세우는 화법을 사용하면서까지 상대에게 진심으로 미안함을 내비친다. 상대는 아직도 나를 사랑하는데 나는 상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를 고통스럽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클로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에 대한 사랑이 식고 다른 남자, 그것도 ‘나’의 직장 동료인 윌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별을 하고자 하나, ‘나’의 마음이 다치는 것은 원치 않기 때문에 ‘너는 아무런 잘못이 없고 우리 사랑의 비극적 종말은 모두 못난 나 때문이다.’를 강조한다.
그러나 사랑에 도덕적 판단을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별 통보를 당한 ‘나’의 사랑 역시도 이타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철저한 이기심에 의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자신이 사랑을 주는 상대에게 마찬가지로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상대에게 사랑을 준 동기가 ‘내가 받기 위함’이었다면 도덕성이 있다고 볼 수 없다. 칸트는 도덕성이란 행동의 동기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따라서 보답에 관계없이 그저 ‘사랑을 주기 위한 동기’로 사랑을 주는, 아가페 혹은 모성애만이 도덕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연인들의 사랑은 준만큼 돌려받지 못하면 깨어지고 만다.
만약 사랑이 이타적인 것이라면 떠나가는 사람조차도 축복하는 것이 옳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을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며 보내드리는 것이 옳다.
떠나간 사랑이 남긴 것
사유재산을 인정함에 따라 재산을 지키거나 혹은 부풀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랑하는 행위조차도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안착하지 못하면 ‘실패’로 치부한다. 그러나 상대방을 법적으로 소유하게 되지 못했다고 하여 그간의 사랑이 부질없는 일이었던 것은 아니다. 이는 실패한 경험조차도 저마다의 교훈이 있는 것처럼 자명하다.
지나간 사랑을 통해 한층 성숙해지고, 앞으로의 사랑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반드시 다른 사랑이 찾아오고, 또 그 사랑을 운명이라 부르기 위해 부단히 애쓸 것이다. 역시 사람은 사람으로 잊게 된다는 옛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다.
가능성에 솔직해지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사랑이 이토록 부질없는 것이었다면, 시작조차도 하지 말아야 하는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회의주의적인 사랑의 실체가 아니다. 다만,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솔직해지자는 것이다.
첫 눈에 사로잡혀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 수도 있고, 불같던 사랑이 금세 식을 수도 있다. 애인이 있는데도 다른 이성이 눈에 들어올 수도 있고, 나아가 육체적인 사랑을 나눌 수도 있다. 이러한 모든 상황들에 대한 만반의 준비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능성에 대한 염두를 둔다면 적어도 자살하기 위해 수면제를 모으는 신세는 면할 수 있다.
식어버린 커피를 마셔본 적 있는가. 식은 커피는 뜨거울 때보다 더 쓰게 느껴진다. 커피는 원래 쓰다. 하지만 뜨거울 때에는 그 뜨거움에 관심이 쏠려 쓴 맛을 잘 느끼지 못하고, 식고 나서야 비로소 쓰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랑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작가는 커피는 뜨거울 때나 식었을 때나 원래 쓰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자신의 경험적 이야기와 함께 사랑에 대한 평생의 고찰을 글에 담아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