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만 모르게 고백했던 한때(Once)

아일랜드 더블린

by 깡아지


달키는 더블린에서 가장 기대하던 장소였습니다. 애들레이드의 트램 같은 다트를 타고 킬리니 언덕에서 내려다본 바다와 바닷가 마을의 전경은 애들레이드의 빅터 하버 같았습니다. 호주에서의 기억이 마음속 깊게 새겨져 있어서 비슷한 것들을 보면 여전히 그곳을 떠올리곤 합니다. 거기도 그랬었는데. 그 사람도 그렇게 말했었는데. 그 가을 이후 우두커니 멈춰 서 있었던 나에게 이제 그만 다시 걸어보자고 손을 잡아주려고 유럽 땅에 온 것이기도 합니다. 죽지 않고 살아가려면 어쨌거나 매년 새로운 가을을 맞이해야 하니까요.


킬리니 언덕 위에서 <원스>의 주인공 여자는 남자가 알아듣지 못하는 체코어로 "밀루유 떼베"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돌아가면 이제는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런 비슷한 말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달키3.jpg 달키의 킬리니 언덕에서 내려다본 더블린



오늘 더블린에는 비가 내렸습니다. 흔히 있는 일이라고 합니다. 회색 하늘과 젖은 채로 바닥에 붙어 있는 낙엽들, 우산을 쓰지 않고 걸어가는 사람들. 더블린은 이런 도시였습니다. 우중충하고 탁하고 고독한 잿빛. 사실 자세를 고쳐앉아 펜을 잡고 글을 쓰는 것은 내가 아니라 고독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더블린이 문학의 도시일 수밖에요. 이런 날 더블린을 걷게 되어 다행이라 여겼습니다. 나는 더블린이 좋았습니다. 흐려서 좋았습니다.


비.jpg 창밖에 아이리쉬 레인이 속살거린다



킬리니 언덕을 시작으로 영화 <원스>의 흔적을 찾아가는 나의 발걸음은 계속되었습니다. 주인공 남녀가 나란히 걷던 그래프턴 거리와 피아노와 기타를 연주하던 와튼 악기점에 가보았습니다. 와튼 악기점은 관광지로 변하지 않고 여전히 악기를 수리하고 파는 가게였습니다. 자본주의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여전한 그 악기점이 좋았습니다.


ㄹㄹ.jpg 그래프턴 거리의 와튼 악기점
와튼.jpg 와튼 악기점의 기타들
ㄱㄱㄱ.jpg 와튼 악기점에서 화음을 맞추는 <원스>의 주인공 남녀



그래프턴 거리를 걸어가다 보면 그 끝에는 세인트 스티븐 공원이 있습니다. <원스>의 맨 처음 장면에서 주인공 남자는 그래프턴 거리에서 버스킹을 하다가 기타케이스에 든 돈을 도둑맞을 뻔 합니다. 도망치는 도둑과 쫓아가는 남자의 한낮의 추격이 벌어지던 도심 속 공원은 넓고 가을이 그러져 있습니다.


주인공의 뒤를 따라가다가 만난 것은 의도치 않게도 더블린의 가을이었습니다. 비가 그치고 나니 이곳의 가을이 마냥 고독이 아니라 어쩌면 여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른 아침 낙엽 떨어지는 공원을 산책하는,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더블린 사람들. 계절은 장소의 것이 아니라 사람의 것일지도 모릅니다. 더블린의 가을 아닌 더블린 사람들의 가을.


1ㅇ.jpg 그래프턴 거리의 세인트 스티븐 공원
ㄹㄹ.jpg 세인트 스티븐 공원의 가을



이곳 사람들은 꽃을 좋아하는지 거리에서 꽃을 파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주인공 여자도 그래프턴 거리에서 꽃을 파는 일이 일상이었지요. 나도 더블린 사람이었다면 꽃을 꽤나 자주 샀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꽃을 보고서 그냥 지나치치 못하는 마음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어서요.


ㄷㄷㄷ.jpg 그래프턴 거리에서 팔리고 있는 꽃



더블린을 떠나는 버스 안에서 <원스>의 ost를 들었습니다. 나는 이제 어떤 곡이 어떤 장면에 삽입되어 있었는지 쉽게 알아맞출 줄 압니다. 그리고 다음에 누군가와 함께 다시 더블린에 온다면 그사람에게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걷다 보니 발길이 닿은, 더블린에서의 기분 좋은 한때(once)를 보냈으니까요.


ㄱㄱㄱㄱㄱㄱ.jpg 모르는 언어의 낯섦을 빌려 여자의 진심을 묻는 남자
ㄱㄱㄱㄱㄱ.jpg 남자만 모르게 고백하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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